리 어답터라는 말에 나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보다는 새로운 기술이든 새로운 제품이든 검증이 되었다고 판단한 후에야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편이다.

그러니 새 아이폰이 나왔다고 선주문에 덤벼들고 이렇게 '개봉기'를 쓴다는 게 내겐 신선하고도 어색한 일이다.

그래서 어설프겠지만, 아이폰 x(라 쓰고 '텐'이라 읽는)를 받고 하루 동안 써 본 감상을 늘어놓아보려 한다.



Say hello to the future 안녕 미래야



애플 홈페이지에서 진행한 실시간 선주문에 실패한 뒤 한참 후, 그러니까 두 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 미국의 통신사 T-mobile에서 손쉽게 성공했다. 그것도 출시 당일 (11월 3일) 배송예정으로. 그 외 Sprint 등 미국의 다른 통신사에서 진행하는 아이폰 선주문도 꽤 늦게까지 출시 당일 배송이 가능했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통신사를 끼고 사는 일의 번거로움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만 해본다. 나 역시 통신사를 끼고 할부로 샀지만, 덕분에 350불 정도의 통신사 지원금과 쓰던 아이폰6 반납금 100~150불 사이를 지원받아 500불 정도에 아이폰x를 샀으니, 감지덕지. 

그리고 정확히 11월 3일 자칭 미래란 녀석이 도착했다. 



전문 리뷰어도 아니고 좋은 사진가는 더더욱 아니기에 아이폰6로 찍은 허접한 사진들 미리 양해를...



실버/스페이스 그레이 (아무리 봐도 화이트 앤 블랙인데) 중 내가 구입한 모델은 스페이스 그레이



디자인은 애플이 거의 늘 그랬듯 완성도 높다. 실물이 예쁘네, 하는 진부한 소릴 하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내가 찍은 사진보단 확실히 실물이 더 아름답다. 아이폰6 사용자로서 뒷면이 이토록 깨끗해진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실버 모델을 사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은색 옆테두리 때문인데, 꼭 플라스틱처럼 보이기도 하고 패션의 완성은 뭐니 뭐니 해도 통일성이라고 믿기에. 사진으론 잘 안 보이지만 유리 뒷면은 짙은 검은색이라기보단 옅은 파스텔톤의 검은색이다. 아무리 그래도 스페이스 그레이라고 우기기엔 좀... 더구나 아이폰6의 스페이스 그레이 색을 생각하면. 이름이야 어쨌든 색감과 디자인은 대만족, 카툭튀는, 뭐, 패스.


그럼 디자인에 대한 더 실감나고 유익한 정보는 유튜버들 및 한국의 전문 블로거들께 토스하고

하루 정도 쓰면서 느꼈던 것들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먼저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관심사였던 페이스 ID.



Homebuttonless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알아먹는다. 안경을 끼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팁이라면 처음에 안경을 끼고 얼굴을 등록하니 안경을 벗은 얼굴을 인식을 못했는데, 안경을 벗고 얼굴 등록을 했더니 그 땐 안경을 쓴 얼굴도 잘 인식했다. 나만 그런 걸 지도?

어쨌든 인식은 빠릿빠릿했고 어두운 곳이든, 빛이 강한 곳이든 실내든 야외든 문제 없었다. 다만, 홍채 인식이 아니라 안면 인식이기에 휴대폰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열린다. 덕분에 내가 그동안 휴대폰을 얼마나 가까이 들여다 보고 있었는 지도 깨닫... 



그리고 사라진 홈버튼

과 방황하는 엄지 손가락.



     

낯설지만 생각보다 좋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낯설지만 생각보다 편하고 쉽다. 오히려 홈으로 돌아가는 기능에 있어서는 홈버튼보다도 편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물론 1일차이니 아직까지는 엄지손가락이 방황하는 일도 있고, 스와이프를 화면 중간까지 해서 멈추는 동작 (위 사진 왼쪽), 즉 앱 멀티태스킹 탭을 여는 동작은 다소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대신, 앱 실행 화면에서 이전 실행 앱으로 넘어가는 동작은 홈버튼보다 편리한데, 스와이프 바에 손가락을 대고 옆으로 넘기기만 하면 (위 사진 오른쪽) 된다. 

물론 어떻게 5년을 넘게 쓴 홈버튼이 하루만에 잊혀지겠냐만 인간은 무섭게 적응한다.

그리고 스와이프 바는 생각보다 더 적응하기 쉬운 기능이다.



그 다음은 많은 사람들이 꼽는 아이폰x 최대의 무기, 카메라. 



내 첫 작품은 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



만만한게 민용이인지라 곤히 자던 녀석을 깨워 앉혀놓고 찍은 사진들. 뭐랄까, 신세계다. 따로 고성능 카메라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 당연히 이전에 쓰던 아이폰6의 사진 경험과 비교할 수 밖에 없는데 정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차이가 났다. 

장비가 좋으니 갑자기 사진 촬영의 열정이 마구 샘솟기까지. 아직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촬영을 해보진 않았어도 벌써 홀딱 반해버렸다. 키노트에서 그렇게 자랑한 4k 동영상 화질 또한 아이폰6와의 비교가 민망할 정도로 훌륭했다. 

앞으로 올라올 고양이들의 사진은 퀄리티가 몹시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

단연코 카메라는 아이폰x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중 하나일 것 같다.



그 다음은 홈버튼과 함께 무수한 논란의 대상이었던 the Notch



위 사진은 유튜브 동영상 재생 시 기본 화면, 아래 사진은 두 손가락으로 화면 끝까지 펼 칠 때 화면

(스마트폰 화면에서는 아래 사진의 왼쪽 끝 중간부분이 notch로 움푹 가려지고, 가장자리 화면이 좀 잘린다.)



역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notch는 생각보다 신경을 거슬리지 않는다. 특히 유튜브 애청자로서 동영상 시청에 대해 걱정이 컸는데 웬걸, 사람의 시야각은(적어도 내 시야각은) 생각보다 좁았다. 집중 해서 동영상을 보니 거의 불편함을 못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분명 개인차가 있을 듯 하다. 난 둔한 사람이니까.



가로보기 화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상단 오른쪽에서 쓸어내리면 나타나는 컨트롤 센터



더불어 아이폰x에서 변화된 주요 UI 중 하나인 notch 옆에서 쓸어내리는 컨트롤 센터도 불만은 없으나 역시나 습관은 습관인지라 자꾸 스와이프 바로 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왼쪽은 애플의 자체 지도 애플맵 화면, 오른쪽은 구글맵 화면

(마찬가지로 스마트폰 상에서는 상단의 중간 부분이 notch로 가려진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나뿐 아니라 각종 어플과 프로그램도 이 notch를 품은 아이폰x의 화면에 아직 적응을 덜 한지라 일부 앱들은 위 사진의 구글맵처럼 홈버튼이 있고 상단부도 광활한 이전 아이폰 화면에 맞춰져 있다. 반면 사파리, 애플맵 등 애플이 만든 어플이나 유튜브, 아마존, 심지어 카카오톡도 화면을 어느새 맞춰놓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화면 비율 최적화가 안 된 어플이 적고 빠른 시일 내에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슬슬 지쳐가니 마무리해야겠다. 

사소한 불만 하나.



너도 홈버튼이 그리운 거니



키패드를 열면, 저런 화면이 나오는데 넓직하고 좋구만, 하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자판 밑에 자리잡은 황량한 공간. 언어 전환 키와 마이크 키만 덜렁 있고 텅 빈 공간이 애플답지 않은 마감이다.

홈버튼을 향한 추모인 지 추가될 새로운 기능의 예고인 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One more thing...




ㅋㅋㅋㅋㅋ

재미있고 신기하다. 딱히 뭐라 더 할 말은 없다.

다만 얼굴 인식 기능이 앞으로 더 다양하게 발전되고 활용되리라 생각한다.



총평을 하자면, 단점은 분명 있으나 개인적으론 보조금 등을 통해 거의 반값에 구입했다는 점, 아이폰6 사용자로서 극적인 변화를 맛보는 즐거움이 워낙 크다는 점에서 기대 이상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선택은 각자의 몫.

*



프로 스포츠 중 거의 유일하게 챙겨보며 열성을 다해 응원하는 것이 야구인데, 그것도 타국에 나오면 그 열정을 지키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시차도 시차거니와, 제대로 시청을 할 만한 경로도 마땅치 않으니까. 그런 이유에 더해 공부한다 일한다 몸과 마음이 바빠 시즌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는 시즌 통틀어서 손에 꼽을만큼 정도의 경기밖에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보다 솔직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응원하는 팀의 성적이 기대 이하였기 때문인 것도...어쩌면 제일 큰 이유?

그리고 어느새 찬바람과 함께 시작된 가을야구. 이쯤되면 내가 응원하는 팀이 벌써 다섯으로 추려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응원팀은 두산 베어스이다. 속전속결 진행된 가을야구 끝에 야구팬이라면 알겠지만 두산 베어스와 기아 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까지 모두 끝났다.

지난 해 그토록 열심히 야구를 챙겨보고 응원을 했던 것이 무색할만큼 관심을 껐다가 팀 성적이 쑥쑥 올라가고 가을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듯 열혈팬이 된 나였지만, 염치 불구하고 나를 한껏 만족시켜주길 바랐는데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어떻게 되었는 지는 굳이 내 입으로 말 하지 않아야지.

너무 낙담하지 않으려 애써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하고 마음을 비워버리면 그 사실 자체는 정말 별 거 아닌 게 되는데, 몹시도 이상한 것은 주위에 당최 기아팬이 왜 이렇게 많은 지 까똑이 불이 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약이 오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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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오랜만에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본 것 같다. 사실 지금껏 본 영화를 통틀어서도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이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그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영화였다. 물론 어쩌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어른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션 베이커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으며 2017년 칸 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었고 한국에서는 2018년 1월 개봉 예정이라 한다. 

 

 

 

포스터만 봐도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

 

 

개봉 예정 영화라 그런지 한국 포털 사이트에도 짤막한 영화 소개 및 줄거리 등을 올렸는데, 정말 짤막한 그 줄거리는 이렇다.

 

"플로리다 디즈니랜드 건너편 '매직 캐슬' 에 살고 있는 6살 무니와 친구들은 그들만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험 계획을 세운다. 이른바, '플로리다 프로젝트'. 디즈니랜드보다 더 신나고 불꽃놀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컬러풀한 여름 이야기"

 

자 그럼 이제 영화 감상을... 하기 전에 딴지를 한 번 걸어보자. 뭐, 영화가 결코 '디즈니랜드보다 더 신나고 불꽃놀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사실쯤은 쉽고 말랑말랑한 언어로 관객을 끌려는 전략 차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만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험 계획을 세우는 데 그것이 이른바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니. 영화를 다 본다면 여기서 'the project'가 주인공들이 사는 모텔 겸 장기투숙단지를 가리킨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의 제목은 디즈니의 테마파크 및 리조트 건설 계획명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런 뒷 이야기를 역자가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이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계획을 세우고 모험을 떠나는 디즈니 애니매이션스러운 서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에서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곁소리는 이만 줄이고 영화 이야기나 하는 걸로.

 

이 영화의 두 중심 축은 6살 무니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 그리고 무니와 무니의 엄마 헤일리의 이야기이다. 무니와 친구들은 무니의 주도 아래 하루도 쉬지 않고 장난을 치며 활보하는 개구쟁이들인데 영화 전반부 그런 아이들의 대책없는,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모습은 플로리다의 아름다운 계절과 풍경과 함께 절로 웃음을 짓게 한다. 

 

 

 

무니와 그의 단짝 친구. 저 한 장면에 아이들의 충만한 개구짐이 넘쳐 흐른다. 동시에 참 사랑스럽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 줄거리 소개는 이 전반부에만 해당하자면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무니의 엄마 헤일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행객들에게 향수 따위를 팔며 하루하루 벌어 집세만 겨우 내는 삶을 영위한다. 그런 침울한 현실조차 영화 전반부에서는 마냥 해맑은 아이들의 활극과 뒤섞여 힘들지만 평화로운 일상처럼 보이는데, 그런 모습은 영화 중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조금씩 틀어지고 만다. 

 

 

 

모녀라기보단 친구같은 헤일리와 무니

 

 

그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해서 헤일리와 무니는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되고 자신들만의 거친 방법으로 회복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다시 신뢰를 얻고 새출발을 하기엔 너무 늦은 걸까. 그러기엔 그들의 방식이 너무 서투르고 투박해보인다. 영화 내내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이 악동같은 두 모녀에 어쩐지 감정이입을 하고, 결코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일들을 저질러도 비호감이 아닌 호감으로 느껴지는 반면, 이웃들과 사회와 국가는, 그들에게 그런 감정이입을 할 여유도 이유도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의 꿈과 희망의 집합체이자 문화적 자긍심의 집결체인 플로리다의 한켠에서, 바로 건너편에서 화려한 디즈니월드의 불꽃놀이가 매일같이 터지는 곳에서, 이런 삶도 펼쳐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곳이 다 그렇듯이.  

 

이 영화가 단순히 쾌활하고 반짝거리는 힐링 영화가 아닌 이유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참혹한 현실에서 아둥바둥하는 하층민들의 비참함을 부각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그런 이들의 억울함과 도덕적 선을 강조해 비극성을 높이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가 모두 그렇듯 실수투성이고 때로는 악인이 되었다 때로는 선인이 되었다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삶,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서 펼쳐지고 있을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단편을 보여준다. 그렇게 이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동하게 한다. 

 

 

 

 

까칠하게 굴 때도 있지만 끝까지 헤일리와 무니를 도와주려 애쓴 모텔 관리인 바비

 

 

영화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플로리다의 여름 풍광도 마음을 빼앗는 데 물론 큰 역할을 한다. 심지어 영화의 주인공들과 이웃들이 모여 살아가는 모텔들마저 관광지답게 알록달록하고 참 아름답다. 플로리다에 놀러갔던 기억이 겹치며 그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났다. '생각해봐, 디즈니월드가 집 앞에 있다니' 란 식으로. 그런데 여행객으로서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뭐, 사실 여행 가서 그 여행지 어딘가에서 신음하며 힘들게 살아갈 원주민들을 걱정하면 그게 더 이상할 지도. 

 

 

 

주인공 무니와 그의 친구들이 사는 '프로젝트'이자 영화의 배경 공간 '퓨처랜드'와 '매직캐슬' 모텔

 

 

 

플로리다 다운 모텔 이름이지만 그곳에서 사는 장기투숙객들에게는 역설적이기만 하다.

 

 

영화의 후반부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이 영화가 끝을 맺는 시퀀스도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그 장면을 촬영한 곳에서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 무려 '아이폰'으로 촬영했다는 엔딩 시퀀스의 마구 흔들리는 앵글과 낮은 화질은 몰입감을 떨어뜨리 거나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는 기분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하며 알 수 없는 쾌감을 준 훌륭한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훌륭한 영화였고 누구에게도 주저없이 추천할 수 있을만한 영화였다. 여름에 보면 더 좋았을. 

 

 

 

 

*

 

 

가 번역 경험에 대해 이런 저런 썰을 풀 만큼 대단한 경력의 번역가가 아니면서도 이런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최근 타성에 젖어(병장 뿐 아니라 일병도 타성에 젖는다) 깊은 고민 없이 빠르게 번역을 해치우려 드는 것 같아 

되새김질하며 공부를 좀 해보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둘 째는, 나같은 초보 뒤에도 후발주자가 있을 거 아닌가. 

감히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어 문법이나 문장 구조 같은 것들을 (얘기할 일도 있겠지만) 분석하려는 것도 아니며

가능하면 "번역"의 관점에서 고민한 것들만 집중하고 싶다. 

그동안 내가 번역을 해오며 있었던 일이나 어려움을 겪었던 아주 짤막한 사례만 가져와서.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라 번역 자료도 엄연히 계약물이고 멋대로 여기저기 올려 놓으면 안되니까? 메이비?

별 거 없는 썰이 그나마 바닥이 날 경우엔 먼 옛날 학교 번역 수업에서 정리했던 사례, 

혹은 다른 이의 번역 사례까지 마구 가져와서 써먹으려 한다.



시작은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거의 처음 정식으로 번역 수업을 들었을 때 일이다.


The first farmer were gardeners who nurtured individual plants,

and they sought out the microclimates and patches of soil that favored those plants.


이 문장을 번역한 게 까마득한 옛날인데 아직도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아니,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번역 수업 과제로 저 문장을 포함한 몇 문장을 번역한 것을 발표하며 

내 번역의 정당성을 교수님과 학우들에게 설득해야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때 나는 교수님께 그야말로 

몸서리를 칠 만큼 길고 긴 설교를 들어야 했다. 발표 당시 나는 저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최초의 농부들은 정원 가꾸듯 몇 종류의 농작물을 재배했고

그러한 작물 재배에 적합한 미기후와 토양을 갖춘 경작지를 찾아냈다.


시시해보이지만 내가 혼난 이유는 하나, 'patches of soil'을 살리지 않았다는 것. 

당시 수업을 맡은 교수님이 워낙에 깐깐하기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린 날의 내가 굳이 'patches'를 '소규모' 따위로 살려야 하느냐고 대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건,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건 순전히 그 다음에 펼쳐진 일 때문이다. 

내 불량한 태도가 맘에 안 드신 교수님이 조곤조곤, 하지만 힘있는 어투로 쏟아내던 

그 백과사전적, 국어사전적 지식에 완전히 압도된 것이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한 단어에서 그토록 많은 지식을 뽐내는 일의 '쿨'함에 반한 걸 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유에서든 그 후로 그 교수님은 번역가로서 내 롤모델의 자리를 한동안 차지했었더랬다.


물론, 번역을 할 때에는, 특히 민감한 내용의 문서를 번역할 때에는 단어 하나 관사 하나도 빼먹지 않고 

번역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뻔하지만 중요한 교훈도 얻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이 일화를 처음으로 꺼내든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거의 1년 이상 내가 해온 번역 작업 대부분이 

비디오, 디지털 매체 등이다보니 정확한 번역보다는 구어체의 자연스러움이나 쉽고 짧은 언어로의 치환이 

주된 목표였던 까닭에 게을리 하고 있던 것들.


*

​역이 얼마나 신비롭고도 중요한 일인지 스스로 감탄하며 다른 사람들, 

특히 내가 사랑하고 나를 인정해줬으면 싶은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고자 무던히 애썼던 때가 있다.

이를테면,

'생각을 해봐. 모양도 순서도 소리도 완전히 다른 어떤 말과 글을 내가 이해한다는 거. 

[Winter]와 [겨울]이라는 전혀 다른 단어를 듣고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는 거. 엄청난 일이야.'

혹은 좀 더 막무가내로,

'아 글쎄, 번역이 없었으면 기독교도 셰익스피어도 현대 의학도 뭐도 없었을 거라니까.'

그러면 예의 그 장난끼 어린 음성으로 너는,

'번역이 중요한 건 맞는데 그것도 다 데이터 싸움이야. 단어와 문장과 문법과 맥락의 데이터. 맥락까지도라니까.’

그렇지만 나를 너무나 잘 아는 너는 덧붙여,

'물론 네 말대로 언어의 맥락은 계속 창조되니까 인간의 번역도 완벽히 대체될 수 없는 창조 작업이지.'

그러면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저 웃고 만다. 오래 전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순진했다. 지금도 사실 그렇다. 

여전히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내게 축복이자 경이로움이다. 내 소소한 자긍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것이 꼭 최고이지 않아도 좋다는 걸 안다.

한글날, 어김없이 컴퓨터 폴더 깊숙한 어딘가에서 나와 날짜만 바뀐 채 쏟아지는 한글의 우수성을 역설하는 기사들을 보며 

쯧, 혀를 차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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