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오랜만에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본 것 같다. 사실 지금껏 본 영화를 통틀어서도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이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그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영화였다. 물론 어쩌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어른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션 베이커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으며 2017년 칸 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었고 한국에서는 2018년 1월 개봉 예정이라 한다. 

 

 

 

포스터만 봐도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

 

 

개봉 예정 영화라 그런지 한국 포털 사이트에도 짤막한 영화 소개 및 줄거리 등을 올렸는데, 정말 짤막한 그 줄거리는 이렇다.

 

"플로리다 디즈니랜드 건너편 '매직 캐슬' 에 살고 있는 6살 무니와 친구들은 그들만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험 계획을 세운다. 이른바, '플로리다 프로젝트'. 디즈니랜드보다 더 신나고 불꽃놀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컬러풀한 여름 이야기"

 

자 그럼 이제 영화 감상을... 하기 전에 딴지를 한 번 걸어보자. 뭐, 영화가 결코 '디즈니랜드보다 더 신나고 불꽃놀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사실쯤은 쉽고 말랑말랑한 언어로 관객을 끌려는 전략 차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만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험 계획을 세우는 데 그것이 이른바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니. 영화를 다 본다면 여기서 'the project'가 주인공들이 사는 모텔 겸 장기투숙단지를 가리킨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의 제목은 디즈니의 테마파크 및 리조트 건설 계획명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런 뒷 이야기를 역자가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이 '플로리다 프로젝트'라는 계획을 세우고 모험을 떠나는 디즈니 애니매이션스러운 서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에서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곁소리는 이만 줄이고 영화 이야기나 하는 걸로.

 

이 영화의 두 중심 축은 6살 무니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 그리고 무니와 무니의 엄마 헤일리의 이야기이다. 무니와 친구들은 무니의 주도 아래 하루도 쉬지 않고 장난을 치며 활보하는 개구쟁이들인데 영화 전반부 그런 아이들의 대책없는,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모습은 플로리다의 아름다운 계절과 풍경과 함께 절로 웃음을 짓게 한다. 

 

 

 

무니와 그의 단짝 친구. 저 한 장면에 아이들의 충만한 개구짐이 넘쳐 흐른다. 동시에 참 사랑스럽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 줄거리 소개는 이 전반부에만 해당하자면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무니의 엄마 헤일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행객들에게 향수 따위를 팔며 하루하루 벌어 집세만 겨우 내는 삶을 영위한다. 그런 침울한 현실조차 영화 전반부에서는 마냥 해맑은 아이들의 활극과 뒤섞여 힘들지만 평화로운 일상처럼 보이는데, 그런 모습은 영화 중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조금씩 틀어지고 만다. 

 

 

 

모녀라기보단 친구같은 헤일리와 무니

 

 

그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해서 헤일리와 무니는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되고 자신들만의 거친 방법으로 회복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다시 신뢰를 얻고 새출발을 하기엔 너무 늦은 걸까. 그러기엔 그들의 방식이 너무 서투르고 투박해보인다. 영화 내내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이 악동같은 두 모녀에 어쩐지 감정이입을 하고, 결코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일들을 저질러도 비호감이 아닌 호감으로 느껴지는 반면, 이웃들과 사회와 국가는, 그들에게 그런 감정이입을 할 여유도 이유도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의 꿈과 희망의 집합체이자 문화적 자긍심의 집결체인 플로리다의 한켠에서, 바로 건너편에서 화려한 디즈니월드의 불꽃놀이가 매일같이 터지는 곳에서, 이런 삶도 펼쳐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곳이 다 그렇듯이.  

 

이 영화가 단순히 쾌활하고 반짝거리는 힐링 영화가 아닌 이유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참혹한 현실에서 아둥바둥하는 하층민들의 비참함을 부각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그런 이들의 억울함과 도덕적 선을 강조해 비극성을 높이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가 모두 그렇듯 실수투성이고 때로는 악인이 되었다 때로는 선인이 되었다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삶,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서 펼쳐지고 있을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단편을 보여준다. 그렇게 이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동하게 한다. 

 

 

 

 

까칠하게 굴 때도 있지만 끝까지 헤일리와 무니를 도와주려 애쓴 모텔 관리인 바비

 

 

영화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플로리다의 여름 풍광도 마음을 빼앗는 데 물론 큰 역할을 한다. 심지어 영화의 주인공들과 이웃들이 모여 살아가는 모텔들마저 관광지답게 알록달록하고 참 아름답다. 플로리다에 놀러갔던 기억이 겹치며 그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났다. '생각해봐, 디즈니월드가 집 앞에 있다니' 란 식으로. 그런데 여행객으로서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뭐, 사실 여행 가서 그 여행지 어딘가에서 신음하며 힘들게 살아갈 원주민들을 걱정하면 그게 더 이상할 지도. 

 

 

 

주인공 무니와 그의 친구들이 사는 '프로젝트'이자 영화의 배경 공간 '퓨처랜드'와 '매직캐슬' 모텔

 

 

 

플로리다 다운 모텔 이름이지만 그곳에서 사는 장기투숙객들에게는 역설적이기만 하다.

 

 

영화의 후반부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이 영화가 끝을 맺는 시퀀스도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그 장면을 촬영한 곳에서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 무려 '아이폰'으로 촬영했다는 엔딩 시퀀스의 마구 흔들리는 앵글과 낮은 화질은 몰입감을 떨어뜨리 거나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는 기분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하며 알 수 없는 쾌감을 준 훌륭한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훌륭한 영화였고 누구에게도 주저없이 추천할 수 있을만한 영화였다. 여름에 보면 더 좋았을. 

 

 

 

 

*

 

 

가 번역 경험에 대해 이런 저런 썰을 풀 만큼 대단한 경력의 번역가가 아니면서도 이런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최근 타성에 젖어(병장 뿐 아니라 일병도 타성에 젖는다) 깊은 고민 없이 빠르게 번역을 해치우려 드는 것 같아 

되새김질하며 공부를 좀 해보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둘 째는, 나같은 초보 뒤에도 후발주자가 있을 거 아닌가. 

감히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어 문법이나 문장 구조 같은 것들을 (얘기할 일도 있겠지만) 분석하려는 것도 아니며

가능하면 "번역"의 관점에서 고민한 것들만 집중하고 싶다. 

그동안 내가 번역을 해오며 있었던 일이나 어려움을 겪었던 아주 짤막한 사례만 가져와서.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라 번역 자료도 엄연히 계약물이고 멋대로 여기저기 올려 놓으면 안되니까? 메이비?

별 거 없는 썰이 그나마 바닥이 날 경우엔 먼 옛날 학교 번역 수업에서 정리했던 사례, 

혹은 다른 이의 번역 사례까지 마구 가져와서 써먹으려 한다.



시작은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거의 처음 정식으로 번역 수업을 들었을 때 일이다.


The first farmer were gardeners who nurtured individual plants,

and they sought out the microclimates and patches of soil that favored those plants.


이 문장을 번역한 게 까마득한 옛날인데 아직도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아니,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번역 수업 과제로 저 문장을 포함한 몇 문장을 번역한 것을 발표하며 

내 번역의 정당성을 교수님과 학우들에게 설득해야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때 나는 교수님께 그야말로 

몸서리를 칠 만큼 길고 긴 설교를 들어야 했다. 발표 당시 나는 저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최초의 농부들은 정원 가꾸듯 몇 종류의 농작물을 재배했고

그러한 작물 재배에 적합한 미기후와 토양을 갖춘 경작지를 찾아냈다.


시시해보이지만 내가 혼난 이유는 하나, 'patches of soil'을 살리지 않았다는 것. 

당시 수업을 맡은 교수님이 워낙에 깐깐하기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린 날의 내가 굳이 'patches'를 '소규모' 따위로 살려야 하느냐고 대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건,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건 순전히 그 다음에 펼쳐진 일 때문이다. 

내 불량한 태도가 맘에 안 드신 교수님이 조곤조곤, 하지만 힘있는 어투로 쏟아내던 

그 백과사전적, 국어사전적 지식에 완전히 압도된 것이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한 단어에서 그토록 많은 지식을 뽐내는 일의 '쿨'함에 반한 걸 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유에서든 그 후로 그 교수님은 번역가로서 내 롤모델의 자리를 한동안 차지했었더랬다.


물론, 번역을 할 때에는, 특히 민감한 내용의 문서를 번역할 때에는 단어 하나 관사 하나도 빼먹지 않고 

번역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뻔하지만 중요한 교훈도 얻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이 일화를 처음으로 꺼내든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거의 1년 이상 내가 해온 번역 작업 대부분이 

비디오, 디지털 매체 등이다보니 정확한 번역보다는 구어체의 자연스러움이나 쉽고 짧은 언어로의 치환이 

주된 목표였던 까닭에 게을리 하고 있던 것들.


*

​역이 얼마나 신비롭고도 중요한 일인지 스스로 감탄하며 다른 사람들, 

특히 내가 사랑하고 나를 인정해줬으면 싶은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고자 무던히 애썼던 때가 있다.

이를테면,

'생각을 해봐. 모양도 순서도 소리도 완전히 다른 어떤 말과 글을 내가 이해한다는 거. 

[Winter]와 [겨울]이라는 전혀 다른 단어를 듣고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는 거. 엄청난 일이야.'

혹은 좀 더 막무가내로,

'아 글쎄, 번역이 없었으면 기독교도 셰익스피어도 현대 의학도 뭐도 없었을 거라니까.'

그러면 예의 그 장난끼 어린 음성으로 너는,

'번역이 중요한 건 맞는데 그것도 다 데이터 싸움이야. 단어와 문장과 문법과 맥락의 데이터. 맥락까지도라니까.’

그렇지만 나를 너무나 잘 아는 너는 덧붙여,

'물론 네 말대로 언어의 맥락은 계속 창조되니까 인간의 번역도 완벽히 대체될 수 없는 창조 작업이지.'

그러면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저 웃고 만다. 오래 전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순진했다. 지금도 사실 그렇다. 

여전히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내게 축복이자 경이로움이다. 내 소소한 자긍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것이 꼭 최고이지 않아도 좋다는 걸 안다.

한글날, 어김없이 컴퓨터 폴더 깊숙한 어딘가에서 나와 날짜만 바뀐 채 쏟아지는 한글의 우수성을 역설하는 기사들을 보며 

쯧, 혀를 차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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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직도 돈과 기술보단 시간과 체력이 더 많은 풋내기 번역가지만 많은 전문 번역가들은 번역 효율성을 위해 Computer-Assisted Translation(CAT) 툴을 사용한다. Machine-aid human translation(MAHT), Interactive translation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Machine Translation과는 개념이 약간 다르다. CAT은 번역가가 번역 시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거고 MT는 말그대로 기계가 번역을 하는 것. 

그런데 사실 요새는 MT 소프트웨어에 인간이 개입해 번역 완성도를 높이고 CAT 툴에도 기계가 반복되는 패턴 번역은 자동으로 처리해주니 명확히 구분을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각설하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CAT 툴 중 하나가 트라도스(SDL Trados Studio)다. 학부생 시절 맛만 살짝 본 후 무료체험까지 해봤는데, 사용하기 전과 사용한 후의 번역 경험(속도, 정확성, 완성도) 차이가 그야말로 내가 중학생 때 교과서 영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와 지금 번역을 할 때의 차이 그 이상이랄까.
문법 교정과 오탈자 검열, 적합한 어휘의 검색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Traslation Memory(TM)라 하여 내가 번역한 데이터를 저장해 똑같은 패턴이 나중에 나오면 자동으로 번역해주는 시스템과 내가 번역한 어휘 쌍 모음집을 구축해주기 때문에 사용을 할수록 효율성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몇 달 사용해보고도 느꼈는데 몇 년을 쓰면 오죽할까.


그런데 왜 당장에 사지 않느냐.

상당히 비싸다. 가장 저렴한 기본 모델이 825 달러. 한화로 거의 천만 원에 달한다. 정말 전문 번역가가 될 마음이 없고서야 구매할 마음이 들지 않을 고가의 사치품인 것이다. 

그래서 학부생 때도 졸업 후에도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전문 번역가로서의 길을 잡은 마당에 길게 내다보고 투자를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사이트를 다시 찾았다. 


그랬더니 웬걸,



국제 번역의  달이 있는 지도 처음 알았다.

굳이 날을 지우고 달로 바꿔 다분히 상업적인 느낌만 들고 정말 그런 날이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쨌든 반가운 할인 행사.
지르고 싶은 욕구가 활활 타오른다.
그러다가도 정말 내게 필요할까, 내가 잘 활용할 수 있을까,
대학원에 진학하고 CAT 툴 등을 제대로 배운 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보아하니 내년 번역의  달에도 할인 행사를 할 것 같은데 그 때까지 기다릴까, 하는 마음에 망설여진다.



아아아아




*


그런데 곧 나올 999+ 달러짜리 아이폰 X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려하는 아이러니.



남의 나라에 온 지 벌써 혹은 이제 겨우 어느 시간이 흘렀다. 처음 맞는 한 계절도 끝나가는 듯 싶었더니 섣부른 짐작을 비웃듯 다시 무덥다. 이국의 늦더위는 고국의 늦더위와 짝을 이뤄 한국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안 들게 한다. 이국의 여름은 고국의 겨울보다 더 친근하고 이국의 도시며 한적한 마을도, 사람까지도 고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일은 감당할 수 있을만큼 고되고 일상은 얼굴 붉히지 않을만큼 익숙하다.


사람은 적응한다.


그래도 이따금씩 '이국적인'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별다른 생각없이 남의 말로 듣고 읽고 말하고 쓰다 느닷없이 그런 말을 듣고 읽고 말하고 쓰는 내 자신이 이국적으로 느껴질 때가. 자연스럽게 이국적이려 애쓰다 지칠 때가. 그럴 때 순전히 나를 위한 번역을 하기도 한다.

화자를 떠난 지 한참인 말을 입 안에 넣고 이런 말로, 저런 말로 굴려보다 적당한 한국어를 찾으면 안도하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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