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책상 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 중 하나, Author Clock.

처음 보면 작은 전자책 리더처럼 생겼지만 이름 그대로 ‘작가의 시계’다. 시간을 5:51, 8:30처럼 숫자로 보여주는 대신, 그 시간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 속 문장을 찾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지금이 5시 51분이라면,

“It wanted but nine minutes to six…”

라는 문장과 함께 작가 이름(Arthur Upfield)과 작품명(Venom House)이 화면에 나타나는 식이다. 이렇게 시간이 바뀔 때마다 분 단위로 새로운 문장이 나타난다. (배터리 절약을 위해 화면이 덜 자주 바뀌게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계를 볼 때마다 뜻밖의 작가와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문장을 끝까지 읽고, 작품 제목까지 한 번 더 보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C 타입 충전. 기기 특성상 한번 충전하면 일주일 이상 거뜬해서 평소에는 깔끔하게 충전 케이블을 빼둔다.


우드 프레임에 흑백 화면, 옆에는 메뉴를 조작하는 작은 다이얼 하나. 화려한 디스플레이도, 앱 알림도 없다. 전자기기인데 오히려 오래된 탁상시계나 작은 액자를 보는 느낌에 가깝다. 특히 화면이 계속 빛을 내는 일반 LCD가 아니라 종이처럼 보이는 e-Ink 디스플레이라서 이런 분위기가 더 살아난다.
 
또 소소한 만족감을 주는 것이 옆에 달린 다이얼이다. 메뉴를 이동하거나 설정을 바꿀 때 다이얼을 돌리는데, 한 칸씩 넘어갈 때 나는 작고 또각거리는 소리와 손끝에 전해지는 저항감이 꽤 좋다. 터치스크린으로 슥슥 넘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설정 메뉴에 들어가면 필요한 여러 가지를 조절할 수 있다.

글꼴과 글자 크기를 바꿀 수 있고, 디지털 시계를 함께 표시할 수도 있으며, 문장이 바뀌는 간격도 설정할 수 있다. 문학적 감성은 좋지만 매번 문장을 해석해서 시간을 알아내는 건 귀찮다면 디지털 시간을 같이 띄우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메뉴를 둘러보다가 웃기면서도 납득이 갔던 기능.

시계 설정에 들어가면 Vague Quotes와 Explicit Quotes를 각각 설정할 수 있다. Explicit Quotes는 욕설이나 성적인 표현 등 조금 더 성인 취향의 내용이 포함된 인용문을 화면에 표시할 것인지 선택하는 옵션이다. 반복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으나 매분 새로운 인용구를 노출하려다 보니 출간된 온갖 작품의 문장들을 따와야 하는 것. 
 

크기는 꽤 아담한 편.


Author Clock은 책을 좋아한다면 물론 잘 어울리겠지만, 꼭 독서광이 아니더라도 책상이나 침대 옆에 둘 조금 특별한 오브제를 찾는 사람에게 꽤 매력적인 제품이다. 무엇보다 매일 수십 번씩 보는 ‘시간’이라는 정보를 이렇게 쓸데없이 낭만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것. 그게 Author Clock을 사는 가장 좋은 이유인 것 같다.
 
읽어 본 책이나, 친숙한 작가, 심지어 내가 아는 구절이 등장하면 생각보다 꽤 반갑다. 책장에서 좋아하는 책을 우연히 다시 발견했을 때처럼,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전혀 모르는 작가와 작품이어도 문장 자체가 재미있으면 그것대로 좋다.

가령 오전 11시 30분을 알려주면서 누군가가 “11시 반밖에 안 됐는데 벌써 술이 필요하다”는 식의 문장이 뜨거나, 새벽 2시를 가리키며 등장인물이 “두 시였다. 그는 아직도 잠들지 못했다” 같은 말을 하고 있으면 상황과 시간이 절묘하게 맞아 괜히 피식 웃게 된다. 시계가 시간을 알려줄 뿐인데 가끔 아주 짧은 농담을 건네는 것 같다.

이 작은 우연들이 쌓이면서 Author Clock은 단순히 예쁜 탁상시계보다 조금 더 정이 가는 물건이 된다.

 
물론, 가격은 사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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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X 개봉기 및 사용기  (4) 2017.11.05

 

청소년기의 나는 판타지 소설에 탐닉했다. 유명한 작품은 물론 만화방과 책방 한쪽 벽을 채웠던 양산형 판타지까지 퀄리티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는 판타지보다 SF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게 됐다. 일종의 동심에서 멀어지는 과정의 일부였을까. 과학기술과 미래 사회,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SF가 조금 더 현실적이고 복잡하며, 어쩌면 더 ‘어른스러운’ 장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 (이하 눈마새)에 대한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왔다. '한국의 반지의 제왕'이라는 평가가 늘 따라다니고, 열성적인 독자들은 작품 속 문장을 거의 경전처럼 인용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네 권이라는 분량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지나치게 높은 기대가 오히려 방해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판타지를 이미 졸업한 취향처럼 취급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난 초여름 한국에 갔을 때 결국 전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온 후 거의 이틀에 한 권씩 읽어 내려가 일주일을 조금 넘겨 네 권을 모두 끝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에는 인간과 나가, 레콘, 도깨비라는 네 선민종족이 살아간다. 열에 민감하고 심장을 적출하는 나가, 거대한 몸과 압도적인 힘을 가진 레콘, 불을 다루지만 피를 두려워하는 도깨비, 그리고 인간. 각 종족은 외형만 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가치관,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완전히 다르다. 흔히 판타지의 비인간 종족은 인간의 특정 성격을 과장한 변형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종족들은 인간을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어느 순간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무엇보다 신체적 특징과 문화, 종교, 정치가 따로 놀지 않는다. 모든 설정이 인물의 선택과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준다. 작가가 거대한 설정집을 먼저 만들고 뒤에 이야기를 붙였다는 느낌도 없다. 설정이 장식이 아니라 서사를 움직이는 원리로 작동한다. 한국적인 소재를 활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세계의 독창성을 설명하기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도깨비와 씨름, 윷 같은 익숙한 요소를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논리로 재구성한 방식은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나가 한 명을 구출하기 위해 인간 케이건 드라카, 레콘 티나한, 도깨비 비형 스라블이 길을 떠나면서 시작되는데, 이 네 사람은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말투와 행동, 심지어 침묵하는 방식까지 다르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단순해 보였던 특징 뒤로 각자의 과거와 욕망, 두려움이 드러난다. 특히 케이건 드라카는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캐릭터다. 지나치게 유능하고 과묵하며 수상할 정도로 많은 것을 아는 인물. 자칫 작가가 멋있어 보이려고 만든 전형적인 먼치킨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능력과 냉정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조금씩 밝혀지면서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티나한과 비형도 단순한 조력자나 분위기 전환용 캐릭터가 아니다. 각자의 성격에는 레콘과 도깨비라는 종족의 삶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기에 네 종족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장면은 때로 피식 웃음이 나다가 때로 숨이 막힐 듯 잔인하다. 

 

눈마새는 신과 왕, 전쟁과 종족의 운명을 다루는 대하 판타지다. 필연적으로, 세계의 질서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인 대화가 많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인간은 왜 왕을 필요로 하는가. 구원은 구하는 사람과 구원받는 사람 중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교조적으로 가르쳐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종족과 인물이 각자의 답을 가지고 행동하고, 그 선택이 부딪히며 이야기가 만들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네 권 내내 무겁고 장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사는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고 유머가 많다. 가볍게 웃고 지나갔던 말이 나중에는 인물의 본질이나 이야기의 주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설정과 문장도 뒤에서 다시 나타나 전혀 다른 무게를 얻는다. 그렇게 심각해졌다가 키득거리기를 반복하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더 이상 넘길 페이지가 없게 되었다. 

 

네 권을 전부 다 읽고 나서야 새삼 든 생각이지만, 이 정도 분량의 책을 읽은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싶다. 행복한 독서 경험이었다. 좋은 판타지는 모든 좋은 이야기가 그렇듯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그 세계에 마음이 쓰이게 만든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 세계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벌써 그 세계가 몹시 그립다. 

 

*

 

마침 최근 눈마새 1권의 공식 영어 번역본도 출간됐다. 영문 제목은 『The Heart of the Nhaga』, 시리즈명은 The Bird That Drinks Tears다. 『저주토끼』 등을 번역한 안톤 허(Anton Hur)가 옮겼다. 한국어판을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국 영역본까지 구입해 이제 막 읽기 시작했다. 작가가 만들어낸 개념들, 종족마다 다른 사고방식과 말투, 한국적인 소재, 언어유희와 복선이 촘촘히 얽혀 있는 이 작품을 영어로 어떻게 구현했는지, 이영도 특유의 대사와 유머를 어떤 리듬으로 옮겼는지도 몹시 궁금하다. 직업병 같은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 천천히 두고 읽을 예정이다. 

 

 

 

 

 

 

 

 

 

 

 

벤저민 알리레 사엔스의 『Aristotle and Dante Discover the Secrets of the Universe』를 읽는 동안 떠오른 한국 소설이 있었다.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다. 하나는 미국 남서부를 배경으로 한 성장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의 일상과 사랑을 그려냈음에도 두 작품이 겹쳐 보인 것은 동일하게 묻고 있는 하나의 질문 때문.

 

아리스토텔레스(아리)는 세상보다 자기 마음을 더 이해하지 못하는 소년이다. 가족의 침묵과 자신의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그는 누구와도 쉽게 가까워지지 못한다. 반면 단테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점은 사랑이 특별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께 수영을 하고, 차를 타고, 별을 바라보고, 긴 침묵을 나누는 평범한 시간들이 결국 한 사람의 세계를 바꾼다. 우주의 비밀은 거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존재가 내 삶의 좌표를 바꾸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작품은 조용히 보여 준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우주론은 거창한 철학 대신 횟집 테이블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회 한 점, 술 한잔, 친구와의 대화, 연인과의 저녁 식사처럼 너무 평범해서 지나치기 쉬운 순간들을 통해 삶을 들여다본다. '우럭 한 점'은 기억이고, 관계이며, 살아 있다는 감각이다. 결국 '우주의 맛'은 한 사람과 우럭 또는 입술을 나누는 자리에서 탄생한다.

 

두 소설은 모두 '우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방향은 인간을 향한다. 우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침묵을 나누는 시간 속에 있고,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과정 속에 있으며, 평범한 술상 위에 놓인 우럭 한 점 속에도 존재한다.

 

결국 우주의 비밀은 별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있다. 오직 한 사람이라는 우주를 경험할 수 있다면, 수십 수백억 광년을 날아가 우주의 끝을 보지 못한들 무슨 아쉬움이 있을까.

 

 

 

+영어 원서 읽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권하기에도 좋을 만큼 술술 읽히는 것도 매력이다. 문장은 짧고 어휘도 어렵지 않아 영어 원서를 한 권 끝내 보고 싶다면 도전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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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마시는 새』 - 판타지로의 귀향  (0) 2026.08.05

 
 
 
내 기억 속에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나 시간을 다루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질서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졌다. 『메멘토』에서는 기억의 질서였고,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의 질서였으며, 『오펜하이머』에서는 역사의 질서였다. 그리고 『오디세이』에서 그가 마주하는 것은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실패에는 교훈이 있고, 고난에는 목적이 있으며, 비극에도 결국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때로 알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고. 오디세우스에게 닥치는 시련들도 그렇다. 폭풍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동료들은 허무하게 죽으며, 신들은 인간의 도덕과는 다른 논리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오디세우스의 지혜도, 영웅성도 아니다. 끝까지 약속을 붙드는 그의 태도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다. 죽은 전우들을 기억하는 의무를 버리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잊지 않으며, 왕으로서의 책임도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수없이 실패하고 흔들리지만,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신의를 지키려는 의지다. 단순히 계약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로 했는가."
 
그 질문에 끝까지 책임지는 삶이다. 운명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자신의 약속만큼은 배신하지 않는 것. 놀란은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자유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신의는 인간 사이에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도 신의가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 신들은 결코 완전한 정의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변덕스럽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잔인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제사를 드리고, 맹세를 지키며, 신을 향한 경외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음에도 신뢰하는 것인가.
 
놀란은 이 주제를 자신의 특유의 연출 방식으로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그는 관객에게 모든 퍼즐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보는 것만 보여 주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끝까지 알 수 없는 채로 남겨 둔다. 덕분에 관객 역시 오디세우스와 같은 위치에 놓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다만 다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 체험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다. 삶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성된 대본을 받아본 적이 없고, 쪽대본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영웅의 승리를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신의를 잃지 않는 사람에 대한 찬가다.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누군가는 약속을 지키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누군가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남기 위해.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이 <오징어 게임>에 이어 전 세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공개된 다음날 밤, 6개의 에피소드를 앉은 자리에서, 아니 누운 자리에서 모두 끝냈다. 눈을 뗄 수 없는 정도였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눈을 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니 이 시리즈에 SF/판타지적 볼거리와 비주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또는 2% 부족한 이야기의 매끄러움이나 클리셰로 일부 장면에서는 스킵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이 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연상호 감독의 웹툰 원작 드라마 <지옥>은 생각을 멈추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출처: 넷플릭스

 

천사(대탈출 악령감옥 편의 대두 귀신...?)가 나타나 이름을 부르며 몇날 몇시에 죽는다는 고지를 한다. 그 날 그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건장한 지옥의 사자들이 찾아와 고지를 받은 사람을 우선 후들겨 패며 고통을 준 후 눈부신 빛을 쏘며 태워 죽인다. 이를 시연이라 한다. 문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는 것이다. 새진리회와 의장 정진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직접적인 죄를 심판하고 메세지를 전하기 위한 신의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그러나 중반 이후, 반전과 함께 이야기는 궤를 달리 한다. 사실 천사의 고지는 그 사람의 죄 유무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 공포와 반면교사로 유지되던 질서는 무너졌다. 사람들은 이제 생각해야 한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출처: 아마존

 

 

이 드라마 시리즈를 보고 나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던 소설. 바로 나의 최애 작가 테드 창의 단편 <지옥은 신의 부재> (원제: Hell is the Absence of God)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영화 <컨택트>의 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담겨있다. 테드 창과 그의 소설에 관해 예찬하는 글을 꼭 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소설 이야기는 각설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라 생각하는 소설이 바로 <지옥은 신의 부재>. 

 

줄거리는 이렇다.

 

이 세상에서는 천사가 강림하고 지옥의 풍경이 불쑥 지상에 비춰진다. 천사는 무작위한 장소에 강림하며 그 여파로 누구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누구는 물리적인 피해를 입어 죽기도 한다. 그러나 생전에 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거의 대부분' 지옥에 간다. 다리에 장애를 갖고 태어난 주인공 닐은 어느 날 천사의 강림으로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었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 천국에 가야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닐. 그런데 천사 강림때 나타나는 천국의 빛을 보면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사 그 사람이 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잔혹한 흉악범이라도. 닐은 그 빛을 보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지옥>과 <지옥은 신의 부재> 두 작품은 동일한 근원적 질문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과 태도를 다르게 조명하기에 상당히 달라보이기도 하지만, 그 질문은 같다. 불행은 왜 일어나는가.

 

 

이쯤되면 이러한 테마의 원형격인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구약성경의 욥기. 그러니 테드 창이 인터뷰에서 해당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욥기'라고 밝힌 것도 이상하지 않다.

 

사탄과 하나님의 내기라는 다소 우화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욥기는 욥이라는 신앙심 깊은 부호가 자신은 이유를 알지 못하는 지독한 시련을 겪으며 그 답을 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뭔가 잘못이 있으니 그런 벌을 받는 거라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마음 속에 은연 중에 자리잡고 있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다그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복을 내려주며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출처: 위키아트

 

 

이해할 수 없는 불행과 고난이 선하고 악함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사실은 우리를 괴롭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종교나 과학의 힘을 빌려 이유를 찾을 수도 있고 이유 없는 불행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느 편이건, 너무 괴롭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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