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의 나는 판타지 소설에 탐닉했다. 유명한 작품은 물론 만화방과 책방 한쪽 벽을 채웠던 양산형 판타지까지 퀄리티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는 판타지보다 SF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하게 됐다. 일종의 동심에서 멀어지는 과정의 일부였을까. 과학기술과 미래 사회,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SF가 조금 더 현실적이고 복잡하며, 어쩌면 더 ‘어른스러운’ 장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 (이하 눈마새)에 대한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왔다. '한국의 반지의 제왕'이라는 평가가 늘 따라다니고, 열성적인 독자들은 작품 속 문장을 거의 경전처럼 인용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네 권이라는 분량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지나치게 높은 기대가 오히려 방해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판타지를 이미 졸업한 취향처럼 취급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난 초여름 한국에 갔을 때 결국 전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온 후 거의 이틀에 한 권씩 읽어 내려가 일주일을 조금 넘겨 네 권을 모두 끝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에는 인간과 나가, 레콘, 도깨비라는 네 선민종족이 살아간다. 열에 민감하고 심장을 적출하는 나가, 거대한 몸과 압도적인 힘을 가진 레콘, 불을 다루지만 피를 두려워하는 도깨비, 그리고 인간. 각 종족은 외형만 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가치관,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까지 완전히 다르다. 흔히 판타지의 비인간 종족은 인간의 특정 성격을 과장한 변형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종족들은 인간을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어느 순간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무엇보다 신체적 특징과 문화, 종교, 정치가 따로 놀지 않는다. 모든 설정이 인물의 선택과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준다. 작가가 거대한 설정집을 먼저 만들고 뒤에 이야기를 붙였다는 느낌도 없다. 설정이 장식이 아니라 서사를 움직이는 원리로 작동한다. 한국적인 소재를 활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세계의 독창성을 설명하기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도깨비와 씨름, 윷 같은 익숙한 요소를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논리로 재구성한 방식은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나가 한 명을 구출하기 위해 인간 케이건 드라카, 레콘 티나한, 도깨비 비형 스라블이 길을 떠나면서 시작되는데, 이 네 사람은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말투와 행동, 심지어 침묵하는 방식까지 다르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단순해 보였던 특징 뒤로 각자의 과거와 욕망, 두려움이 드러난다. 특히 케이건 드라카는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캐릭터다. 지나치게 유능하고 과묵하며 수상할 정도로 많은 것을 아는 인물. 자칫 작가가 멋있어 보이려고 만든 전형적인 먼치킨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능력과 냉정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조금씩 밝혀지면서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티나한과 비형도 단순한 조력자나 분위기 전환용 캐릭터가 아니다. 각자의 성격에는 레콘과 도깨비라는 종족의 삶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기에 네 종족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장면은 때로 피식 웃음이 나다가 때로 숨이 막힐 듯 잔인하다. 

 

눈마새는 신과 왕, 전쟁과 종족의 운명을 다루는 대하 판타지다. 필연적으로, 세계의 질서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인 대화가 많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인간은 왜 왕을 필요로 하는가. 구원은 구하는 사람과 구원받는 사람 중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교조적으로 가르쳐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종족과 인물이 각자의 답을 가지고 행동하고, 그 선택이 부딪히며 이야기가 만들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네 권 내내 무겁고 장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사는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고 유머가 많다. 가볍게 웃고 지나갔던 말이 나중에는 인물의 본질이나 이야기의 주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설정과 문장도 뒤에서 다시 나타나 전혀 다른 무게를 얻는다. 그렇게 심각해졌다가 키득거리기를 반복하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더 이상 넘길 페이지가 없게 되었다. 

 

네 권을 전부 다 읽고 나서야 새삼 든 생각이지만, 이 정도 분량의 책을 읽은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싶다. 행복한 독서 경험이었다. 좋은 판타지는 모든 좋은 이야기가 그렇듯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그 세계에 마음이 쓰이게 만든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그 세계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벌써 그 세계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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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최근 눈마새 1권의 공식 영어 번역본도 출간됐다. 영문 제목은 『The Heart of the Nhaga』, 시리즈명은 The Bird That Drinks Tears다. 『저주토끼』 등을 번역한 안톤 허(Anton Hur)가 옮겼다. 한국어판을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국 영역본까지 구입해 이제 막 읽기 시작했다. 작가가 만들어낸 개념들, 종족마다 다른 사고방식과 말투, 한국적인 소재, 언어유희와 복선이 촘촘히 얽혀 있는 이 작품을 영어로 어떻게 구현했는지, 이영도 특유의 대사와 유머를 어떤 리듬으로 옮겼는지도 몹시 궁금하다. 직업병 같은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 천천히 두고 읽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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