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슨 일 하세요?"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꼳 듣게 되는 질문이다. 이제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로컬라이제이션 일을 합니다."
라고 답하면, 높은 확률로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게 무슨 일이에요?"
그러면 나는 기꺼이, 어떤 사명감까지 가지고 주절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번역이랑은 조금 다르고, 글로벌 제품을 여러 언어와 문화에 맞게 현지화하는 과정이고, 번역뿐 아니라 품질 관리와 프로세스, 기술적인 부분도 함께 다루고,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듣는 사람은 별 관심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피곤한 경우를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그 사명감도 늘 버티진 못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대충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길 때도 있는데, 사실 가장 효과가 좋은 답은 따로 있다.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경우 내가 바라던 대로 대화는 거기서 끝난다. 사실은 거기서부터 시작인데도.
 

*

번역이 시작되기 전, 그리고 끝나고 난 자리

많은 사람들이 번역과 로컬라이제이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영어가 한국어로 바뀌어 있으면 ‘번역됐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두 개념은 엄밀히 다르다.
 
번역(Translation)은 텍스트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말한다. 반면 현지화/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 또는 l10n((l과 n 사이에 알파벳이 10개)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특정 국가와 문화에 자연스럽게 맞추는 전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번역은 그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 중 하나이지만, 전체는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만든 새로운 운동 앱을 전 세계 시장에 출시한다고 가정해 보자. 가능한 한 많은 언어를 지원하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어떤 국가를 먼저 출시할지, 어떤 언어를 지원할지, 앱 전체를 현지화할지 아니면 마케팅 자료나 핵심 기능부터 번역할지 같은 결정은 시장 규모, 사용자 수, 비즈니스 전략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함께 제품은 처음부터 여러 언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야 한다. 영어 텍스트를 코드에 직접 입력하지 않고 분리해 관리하고, 날짜와 시간, 숫자, 통화, 주소 형식 등이 국가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를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 줄여서 i18n(i와 n 사이에 알파벳이 18개)이라고 부른다.
 
그다음에야 실제 번역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번역이 끝나도 바로 출시하지는 않는다. 앱 화면에서 문장이 잘리지 않는지, 버튼이 깨지지는 않는지, 각 언어가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표시되는지, 날짜나 통화 표기가 해당 국가의 관습에 맞는지 등을 테스트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문제가 발견되면 다시 수정하고, 다시 테스트를 거친 뒤에야 사용자에게 제품이 전달된다.
 

 
위의 사이클은 간단히 구성한 로컬라이제이션의 단계인데, 기본적인 예시일 뿐 제품/서비스의 특성이나 기업마다 변주는 존재한다. 그럼 이제 자연스럽게 들게 되는 의문은, 이 모든 일을 누가 하느냐이다. 
 

단계 플레이어
① 분석 및 계획 클라이언트 (Localization PM, Program Manager, Product Manager, Marketing 등)
② 인터내셔널라이제이션(i18n) 클라이언트 (개발자, Software Engineer, UX Designer 등)
③ 번역 벤더(LSP) 또는 프리랜서 번역가
④ 검수 및 QA 벤더(LSP)의 리뷰어/언어 전문가 (번역 벤더와 다른 업체인 경우 多)
⑤ 테스팅 / QA 클라이언트 QA팀 또는 QA 전문 벤더(번역/리뷰 벤더와 다른 업체인 경우 多)
⑥ 납품 및 배포 클라이언트 (개발팀, Release Manager, DevOps 등)

 
물론 실제 사례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어떤 기업은 번역부터 QA까지 하나의 로컬라이제이션 벤더에 맡기기도 하고, 어떤 기업은 번역, 리뷰, 테스트를 각각 다른 업체에 맡기기도 한다. 또한 대규모 테크 기업은 번역을 제외한 상당수 과정을 내부 팀에서 직접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클라이언트가 제품과 전략을 책임지고, 벤더가 언어와 품질을 지원하는 구조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나 역시 벤더와 클라이언트 양쪽에서 모두 일해 보며, 같은 '로컬라이제이션'이라는 단어 안에서도 역할과 관점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업계를 이루는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각자의 역할을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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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 #3 로컬라이제이션 업계의 플레이어들 - 벤더 사이드(Vendor Side)

 

#1

 
누구나 자신의 커리어와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에게는 지금이 그런 시기인가 싶다.
 

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 번역으로 일을 시작한 뒤 벤더와 클라이언트 사이드를 거치며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을 로컬라이제이션 업계에서 보냈다. 그동안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더 넓은 경험을 쌓고, 내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앞을 향해 걸어왔다. 자연스럽게 경험을 기록하거나 누군가와 나눌 여유는 많지 않았다. 특히나 한국어로는 더더욱.
 
한국에서 일할 때도 그랬지만, 미국으로 와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여실히 느낀 점이 있다.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데, 정작 한국어로 로컬라이제이션을 이야기하는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 번역 툴을 소개하거나 개별 기술을 설명하는 자료는 있지만, 로컬라이제이션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 왜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지, 현업에서는 어떤 고민을 하는지를 풀어낸 이야기는 쉽게 찾기 어려웠다.
 
물론 나 역시 이 분야를 모두 알지 못한다. 지금도 매일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문제를 만나고,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더구나 로컬라이제이션은 AI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 동안 보고 배우고 고민했던 것들을 조금씩 기록해 두는 일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시리즈,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기술적인 지침서나 거창한 커리어 길라잡이가 되려는 건 아니다. 번역과 로컬라이제이션은 무엇이 다른지, 글로벌 제품은 어떻게 여러 언어로 출시되는지, 번역 품질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AI는 이 업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까지. 현업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품게 된 질문들을 하나씩 함께 살펴보는 기록이 되었으면 한다. 로컬라이제이션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게는 이 업계를 이해하는 데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잠시 생각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 지난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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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 #2 번역과 로컬라이제이션, 뭐가 다를까

내가 번역 경험에 대해 이런 저런 썰을 풀 만큼 대단한 경력의 번역가가 아니면서도 이런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최근 타성에 젖어(병장 뿐 아니라 일병도 타성에 젖는다) 깊은 고민 없이 빠르게 번역을 해치우려 드는 것 같아 

되새김질하며 공부를 좀 해보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둘 째는, 나같은 초보 뒤에도 후발주자가 있을 거 아닌가. 

감히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어 문법이나 문장 구조 같은 것들을 (얘기할 일도 있겠지만) 분석하려는 것도 아니며

가능하면 "번역"의 관점에서 고민한 것들만 집중하고 싶다. 

그동안 내가 번역을 해오며 있었던 일이나 어려움을 겪었던 아주 짤막한 사례만 가져와서.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라 번역 자료도 엄연히 계약물이고 멋대로 여기저기 올려 놓으면 안되니까? 메이비?

별 거 없는 썰이 그나마 바닥이 날 경우엔 먼 옛날 학교 번역 수업에서 정리했던 사례, 

혹은 다른 이의 번역 사례까지 마구 가져와서 써먹으려 한다.



시작은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거의 처음 정식으로 번역 수업을 들었을 때 일이다.


The first farmer were gardeners who nurtured individual plants,

and they sought out the microclimates and patches of soil that favored those plants.


이 문장을 번역한 게 까마득한 옛날인데 아직도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아니,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번역 수업 과제로 저 문장을 포함한 몇 문장을 번역한 것을 발표하며 

내 번역의 정당성을 교수님과 학우들에게 설득해야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때 나는 교수님께 그야말로 

몸서리를 칠 만큼 길고 긴 설교를 들어야 했다. 발표 당시 나는 저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최초의 농부들은 정원 가꾸듯 몇 종류의 농작물을 재배했고

그러한 작물 재배에 적합한 미기후와 토양을 갖춘 경작지를 찾아냈다.


시시해보이지만 내가 혼난 이유는 하나, 'patches of soil'을 살리지 않았다는 것. 

당시 수업을 맡은 교수님이 워낙에 깐깐하기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린 날의 내가 굳이 'patches'를 '소규모' 따위로 살려야 하느냐고 대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건,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건 순전히 그 다음에 펼쳐진 일 때문이다. 

내 불량한 태도가 맘에 안 드신 교수님이 조곤조곤, 하지만 힘있는 어투로 쏟아내던 

그 백과사전적, 국어사전적 지식에 완전히 압도된 것이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한 단어에서 그토록 많은 지식을 뽐내는 일의 '쿨'함에 반한 걸 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유에서든 그 후로 그 교수님은 번역가로서 내 롤모델의 자리를 한동안 차지했었더랬다.


물론, 번역을 할 때에는, 특히 민감한 내용의 문서를 번역할 때에는 단어 하나 관사 하나도 빼먹지 않고 

번역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뻔하지만 중요한 교훈도 얻었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이 일화를 처음으로 꺼내든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거의 1년 이상 내가 해온 번역 작업 대부분이 

비디오, 디지털 매체 등이다보니 정확한 번역보다는 구어체의 자연스러움이나 쉽고 짧은 언어로의 치환이 

주된 목표였던 까닭에 게을리 하고 있던 것들.


*


나야 아직도 돈과 기술보단 시간과 체력이 더 많은 풋내기 번역가지만 많은 전문 번역가들은 번역 효율성을 위해 Computer-Assisted Translation(CAT) 툴을 사용한다. Machine-aid human translation(MAHT), Interactive translation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Machine Translation과는 개념이 약간 다르다. CAT은 번역가가 번역 시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거고 MT는 말그대로 기계가 번역을 하는 것. 

그런데 사실 요새는 MT 소프트웨어에 인간이 개입해 번역 완성도를 높이고 CAT 툴에도 기계가 반복되는 패턴 번역은 자동으로 처리해주니 명확히 구분을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각설하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CAT 툴 중 하나가 트라도스(SDL Trados Studio)다. 학부생 시절 맛만 살짝 본 후 무료체험까지 해봤는데, 사용하기 전과 사용한 후의 번역 경험(속도, 정확성, 완성도) 차이가 그야말로 내가 중학생 때 교과서 영어를 한국어로 옮길 때와 지금 번역을 할 때의 차이 그 이상이랄까.
문법 교정과 오탈자 검열, 적합한 어휘의 검색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Traslation Memory(TM)라 하여 내가 번역한 데이터를 저장해 똑같은 패턴이 나중에 나오면 자동으로 번역해주는 시스템과 내가 번역한 어휘 쌍 모음집을 구축해주기 때문에 사용을 할수록 효율성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몇 달 사용해보고도 느꼈는데 몇 년을 쓰면 오죽할까.


그런데 왜 당장에 사지 않느냐.

상당히 비싸다. 가장 저렴한 기본 모델이 825 달러. 한화로 거의 천만 원에 달한다. 정말 전문 번역가가 될 마음이 없고서야 구매할 마음이 들지 않을 고가의 사치품인 것이다. 

그래서 학부생 때도 졸업 후에도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전문 번역가로서의 길을 잡은 마당에 길게 내다보고 투자를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사이트를 다시 찾았다. 


그랬더니 웬걸,



국제 번역의 날  달이 있는 지도 처음 알았다.

굳이 날을 지우고 달로 바꿔 다분히 상업적인 느낌만 들고 정말 그런 날이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쨌든 반가운 할인 행사.
지르고 싶은 욕구가 활활 타오른다.
그러다가도 정말 내게 필요할까, 내가 잘 활용할 수 있을까,
대학원에 진학하고 CAT 툴 등을 제대로 배운 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보아하니 내년 번역의 날  달에도 할인 행사를 할 것 같은데 그 때까지 기다릴까, 하는 마음에 망설여진다.



아아아아




*


그런데 곧 나올 999+ 달러짜리 아이폰 X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려하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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