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영화의 계절감이 강렬히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책을 봐도 그렇고 음악을 들어도 그렇다. 그런 힘이 좋은 영화, 좋은 책, 좋은 음악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순 없지만, 충분 조건이기엔 분명하다. 삼천포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어떤 계절의 향수를 불러오는 영화보다 그런 힘을 가진 글과 음악이 훨씬 더 많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계절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인 시각으로 투사할 수 있는 영화가 가장 유리한 매체일 것 같은데도. 단순한 추측을 하자면 노출 빈도가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봄을 이야기한 혹은 배경으로 한 그 어떤 책과 영화가 만들어진들 "벚꽃엔딩"의 그 엄청난 환기력을 능가할 수 있기란 쉽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시작은 계절감을 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의 더 큰 범주는 퀴어영화다. 지금껏 내가 본 (넓은 의미의) 퀴어영화라봐야 두 손에 꼽을 수준인데, 재미있는 건 그 중 절반 가까이가 최근 2년 사이에 본 영화라는 사실이고 그 영화들이 모두 최근 2년 새 본 가장 훌륭한 영화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캐롤>을 본 직후 찾아본 <가장 따뜻한 색, 블루>(한국 개봉은 2014년)부터 <캐롤>, 그리고 <문라이트>와 <콜미 바이 유어 네임>까지. 이 영화들은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이 인정하는 퀴어영화의 어벤져스가 아닌가 싶다. 최근 나오는 퀴어영화들의 완성도가 높아진 건지 내가 그동안 몰랐던 건지는 모르겠다. 비슷해보여도 저마다 매력이 다른 네 편 모두 하고싶은 말이 많은 영화지만 이번에는 콜바유만 이야기하는 걸로.







사설이 길어졌지만 정말 콜바유의 얘기를 시작하자면, 안드레 애치먼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이 영화는 여름 로맨스극의 정석이라 불릴 만 하다. 게으른 탓에 더 근사한 사진을 싣지 못하지만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여름날 이탈리아의 풍광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무더운 여름날의 나른함과 무기력함이 영화의 초장을 감싼다. 학문의 목적으로 미국에서 자신의 스승이 있는 어느 이탈리아 시골 마을로 날아온 대학원생 올리버와 그가 6주간 머물 집에 사는 예술가 소년 엘리오의 첫만남은 그 여름날만큼이나 싱겁고 무기력하다.


그러고도 얼핏 지루해보이고 간지럽게 신경을 건드리는 두 남자의 감정을 향한 클로즈업과 와이드샷이 반복된다. 누구의 사랑에나 감정은 차곡차곡 쌓여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영화가 관객에게 사랑의 과정을 축구 중계하듯 보여주고 사랑의 감정을 관객에게 마구 들이미는지. 그러나 올리버와 엘리오는 오래도록 그 긴장의 끈을 양쪽에서 쥔 채 조심스런 줄다리기를 한다. 그리고 그 줄다리기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사랑의 대상이자 자아 발견의 대상이었기에 더 팽팽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감정의 중심에는 서로를 바라보고 탐구하는 조심스러운 시선에 있었다. 활달한 올리버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하는 엘리오와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쓰는 엘리오를 보는 올리버의 시선.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여성을 만나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 쉽게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멈춰서고 서로를 보는 시선. 그리고 마침내 올리버와 엘리오가 서로를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할 때, 그 감정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더 일찍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때쯤이면 영화는 관객에게 슬픈 예감을 안게 한다. 여름날의 무더위도 눈부심도 끝은 정해져 있듯이. 비록 그 예감은 반쯤은 맞았지만 또 반은 틀리다. 눈물의 작별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 올리버가 다시 돌아와 엘리오에게 청혼이라도 해야만 두 사람의 사랑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교류는 올리버에게, 그리고 짐작컨대 엘리오에게는 더 큰 여운과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올리버 역을 맡은 아미 해머의 연기도 물론 훌륭했지만 엘리오 역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는 그야말로 최고의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핫스타라는 말은 충분한 근거가 있는 말이지 않을까. 복잡한 감정들을 담아내는 그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궁금증이 들게 하고 해석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앞으로 이 배우가 또 어느 영화에서 어떤 모습을 선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된다 다음 행보가.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의심할 여지 없는 좋은 영화지만, 이 영화는 꼭 같이 언급해야겠다. 이미 오래 전에 본 영화에 대한 감상을 쓸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으니. 토드 헤인스 감독,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주연의 <캐롤>이다. 만약 내멋대로 지금껏 봐온 로맨스/멜로 드라마 영화의 순위를 매긴다면 이 영화는 세 손가락 안에 넉넉히 들어오지 않을까. 아름답고 품위 있으며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영화. 보는 순간, 그리고 보고나서도 한동안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영화이자 케이트 블란쳇에 대한 팬심을 절정에 달하게 한 영화. 콜바유와 닮은 점도 많지만 또 다른 분위기와 결말 등 다른 점도 많은 캐롤은 내 겨울의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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