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기억 속에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나 시간을 다루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질서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졌다. 『메멘토』에서는 기억의 질서였고,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의 질서였으며, 『오펜하이머』에서는 역사의 질서였다. 그리고 『오디세이』에서 그가 마주하는 것은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실패에는 교훈이 있고, 고난에는 목적이 있으며, 비극에도 결국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때로 알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고. 오디세우스에게 닥치는 시련들도 그렇다. 폭풍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동료들은 허무하게 죽으며, 신들은 인간의 도덕과는 다른 논리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오디세우스의 지혜도, 영웅성도 아니다. 끝까지 약속을 붙드는 그의 태도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다. 죽은 전우들을 기억하는 의무를 버리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잊지 않으며, 왕으로서의 책임도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수없이 실패하고 흔들리지만,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신의를 지키려는 의지다. 단순히 계약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로 했는가."
그 질문에 끝까지 책임지는 삶이다. 운명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자신의 약속만큼은 배신하지 않는 것. 놀란은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자유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신의는 인간 사이에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도 신의가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 신들은 결코 완전한 정의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변덕스럽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잔인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제사를 드리고, 맹세를 지키며, 신을 향한 경외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음에도 신뢰하는 것인가.
놀란은 이 주제를 자신의 특유의 연출 방식으로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그는 관객에게 모든 퍼즐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보는 것만 보여 주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끝까지 알 수 없는 채로 남겨 둔다. 덕분에 관객 역시 오디세우스와 같은 위치에 놓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다만 다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 체험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다. 삶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성된 대본을 받아본 적이 없고, 쪽대본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영웅의 승리를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신의를 잃지 않는 사람에 대한 찬가다.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누군가는 약속을 지키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누군가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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