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과 같은 표현으로 번역해 주세요.”

 

클라이언트가 새로운 번역 프로젝트를 요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난번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번역가가 다시 배정되었고, 이전 번역도 번역 메모리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품질과 스타일을 유지하기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작업을 시작하자 같은 기능이 세 가지 이름으로 나타난다. 어떤 문장에서는 ‘활동’, 다른 문장에서는 ‘액티비티’, 또 다른 곳에서는 ‘운동’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기존 번역은 ‘합니다’체와 ‘해요’체가 섞여 있고, 몇 달 전에 바뀐 제품명이 번역 메모리에는 여전히 이전 이름으로 남아 있다. LSP는 어느 표현을 따라야 할지  문의하고, 클라이언트의 로컬라이제이션팀은 제품팀과 지역 마케팅팀에 다시 확인한다. 확인하는 사람마다 기억하는 결정이 조금씩 다르다. 결국 출시를 앞두고 리뷰어가 상당수의 문장을 다시 수정한다.

 

실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경우 문제는 번역가가 이전 번역을 보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회사가 그동안 내린 언어적 결정을 한 곳에 정리하고 관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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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프로젝트 후 남는 것들

번역 프로젝트가 끝나면 번역된 문장만 남는 것이 아니다. 제품의 핵심 기능을 무엇이라고 부르기로 했는지, 사용자에게 어떤 어조로 말하기로 했는지, 반복되는 문장을 이전에는 어떻게 번역했는지, 특정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이유도 함께 남는다.

 

이렇게 번역 과정에서 축적된 언어적 지식과 결정을 언어 자산(linguistic assets)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언어 자산에는 스타일 가이드(Style Guide), 용어집(Glossary), 번역 메모리(Translation Memory), 그리고 부가적으로 참고 자료(Reference material)와 질의 기록(Query) 등이 있다. 흔히 이들을 번역을 도와주는 참고 파일 정도로 생각하지만, 잘 관리된 언어 자산은 그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한다. 새로운 번역가와 벤더가 제품의 언어를 빠르게 이해하도록 돕고, 여러 프로젝트와 언어에 걸쳐 일관성을 유지하며, 이미 내린 결정을 매번 처음부터 논의하는 일을 줄인다. 무엇보다 언어 자산은 한 회사가 사용자에게 어떻게 말해왔는지를 기억한다.

 

스타일 가이드

"Download the app"은 다음과 같이 여러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앱을 다운로드하십시오.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앱을 받아보세요.

 

세 문장 모두 의미는 맞다. 그러나 한 제품 안에서 어떤 화면은 “다운로드하십시오”, 다른 화면은 “다운로드하세요”라고 말한다면 사용자는 미묘한 불일치를 느낀다. 어느 표현이 맞는지는 사전이나 번역가 개인의 선호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금융 서비스처럼 정확성과 신뢰감을 강조하는 제품과 가볍고 친근한 운동 앱은 사용자에게 말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일 가이드는 이런 선택의 기준을 정한다. 존댓말의 수준, 문장의 길이, 사용자 호칭, 능동태와 수동태, 숫자와 단위 표기, 문장부호, 외래어 표기처럼 반복적으로 필요한 원칙을 담는다. UI와 마케팅, 고객지원 콘텐츠에 서로 다른 어조가 필요하다면 그 차이도 설명한다.

좋은 스타일 가이드는 금지사항만 나열하지 않는다. 브랜드가 어떤 목소리를 지향하는지 설명하고, 권장하는 표현과 피해야 할 표현을 실제 예시로 보여준다.

지향하는 표현: 운동을 시작해 보세요.
피해야 할 표현: 운동을 시작하십시오.

이유: 전문성을 유지하되 사용자에게 명령하는 인상을 줄이지 않는다.

 

규칙보다 중요한 것은 그 규칙을 만든 의도다. 의도를 이해한 번역가는 가이드에 없는 새로운 문장을 만났을 때도 일관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용어집

제품에는 일반 사전만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다. trip, journey, route, course 등의 단어들이 일상에서는 비슷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하나의 내비게이션이나 운동 제품 안에서는 각각 다른 기능을 가리킬 수 있다. 이 단어들을 모두 ‘경로’라고 번역하면 사용자는 서로 다른 기능을 구분하기 어렵다. 반대로 문맥마다 자유롭게 번역하면 같은 기능의 이름이 화면에 따라 달라진다. 용어집은 이런 핵심 개념의 승인된 번역을 관리한다. 조금 더 체계적인 용어집에는 원문과 번역어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정보도 포함될 수 있다.

  • 용어의 정의와 품사
  • 승인된 번역과 사용하지 않는 번역
  • 실제 사용 예시
  • 관련 기능이나 제품
  • 대소문자와 복수형 규칙
  • 언어 또는 지역별 예외
  • 용어를 승인한 사람과 변경 이력

예를 들어 activity의 승인 번역이 ‘활동’이라고 적혀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운동 기록을 의미하는지, 사용자의 일반적인 앱 활동을 뜻하는지, 특정 제품 기능의 공식 명칭인지에 따라 다른 번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용어집은 단어의 번역보다 개념의 경계를 설명한다. “이 단어를 이렇게 번역하라”뿐 아니라 “이 용어는 무엇이며, 언제 이 번역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번역 메모리

번역 메모리(Translation Memory, TM)는 이전에 번역한 원문과 번역문을 문장 또는 세그먼트 단위로 저장한다.

 

새로운 원문이 들어오면 번역 툴은 번역 메모리에서 같거나 비슷한 문장을 찾아 번역가에게 제안한다. 완전히 같은 문장은 100% 매치로, 일부가 다른 문장은 퍼지 매치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전에 다음 문장을 번역했다고 해보자.

Connect your device to the app.
기기를 앱에 연결하세요.

 

새 프로젝트에 Connect your watch to the app이라는 문장이 들어오면 번역 메모리는 기존 번역을 비슷한 문장으로 제안한다. 번역가는 이를 참고해 빠르게 “시계를 앱에 연결하세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반복이 많은 소프트웨어와 기술 문서에서는 번역 메모리가 일정과 비용을 크게 줄여준다. 버튼, 오류 메시지, 설정 안내처럼 자주 반복되는 문구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도 유용하다. 하지만 번역 메모리는 정답을 기억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이전의 결정을 기억하는 시스템이다. 과거의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제품의 스타일이 바뀌었다면 번역 메모리는 오래된 결정도 충실하게 제안한다. 기능명이 변경되었는데 기존 번역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높은 매치율을 가진 오래된 제품명이 새로운 콘텐츠에 계속 들어갈 수 있다.

 

실제 실무에서 지켜보면 100% 또는 하이 퍼지(High-fuzzy) 매치라는 이유로 충분한 검토 없이 번역이 승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후 제품 화면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새로 작업한 번역가를 의심하지만, 실제 오류의 출처는 몇 년 전에 저장된 번역일 수 있다. 번역 메모리의 크기가 곧 품질을 의미하지 않는 이유다. 오래된 번역과 중복 문장, 잘못 정렬된 원문과 번역문을 정기적으로 정리하고, 제품명이나 스타일 변경이 기존 데이터에도 반영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참고 자료

스타일 가이드와 용어집, 번역 메모리가 모두 있어도 문맥이 없으면 정확한 번역이 어려울 수 있다. 특히 소프트웨어 번역가의 경우 완성된 화면을 보면서 작업하기보다 TMS 안에 나열된 문자열을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번역 툴에 "charge" 단어 하나만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배터리를 ‘충전’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요금을 ‘청구’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명사라면 ‘충전량’, ‘요금’ 또는 ‘혐의’를 뜻할 가능성도 있다. 원문은 하나지만 제품 안에서 필요한 번역은 전혀 다르다. 스크린샷, 기능 설명, 문자열 ID, 글자 수 제한, 이전 화면과 다음 화면에 관한 정보가 있다면 번역가는 훨씬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게임이라면 캐릭터의 성별과 성격, 다른 인물과의 관계, 장면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자료가, 동영상 자막이라면 영상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참고 자료는 부가적인 친절이 아니라 번역 품질을 결정하는 언어 자산이다. 번역가에게 더 정확하게 번역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제품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면, 번역가는 언어를 옮기는 동시에 제품의 맥락까지 추측해야 한다.

 

질의 기록

번역 과정에서는 가이드에 없는 문제가 계속 나타난다. 새로운 기능명을 번역할 것인지 영어로 유지할 것인지, 마케팅팀이 선호하는 표현을 UI에도 적용할 것인지, 글자 수 때문에 승인 용어의 축약형을 사용할 수 있는지처럼 기존 규칙만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문제는 질문에 한 번 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메일이나 메신저에서 결정된 내용이 공식 자산에 반영되지 않으면 몇 달 뒤 같은 질문이 다시 등장한다. 담당자가 바뀌면 결정의 존재 자체를 알기 어렵다.

 

실제로 한 프로젝트에서 특정 용어를 지역팀의 요청으로 변경했더라도 그 내용이 용어집에는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다음 프로젝트의 번역가는 기존 승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지역팀은 “지난번에 이미 바꿨는데 왜 다시 돌아왔느냐”고 묻는다. 번역가는 제공받은 자산을 정확히 따랐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사람처럼 보인다.

 

따라서 중요한 질의와 결정은 검색할 수 있는 형태로 기록하고, 필요한 경우 스타일 가이드와 용어집, 번역 메모리에 반영해야 한다. 결정 기록은 최종 답변뿐 아니라 변경의 이유와 적용 범위를 함께 남길 때 더 유용하다.

 

모든 자산이 자산은 아니다

많은 벤더 및 클라이언트 회사들이 스타일 가이드와 용어집, 번역 메모리 등 '자산'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나 파일이 '존재'한다는 것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는 것은 다르다. 스타일 가이드는 몇 년째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텀베이스에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 제품명이 남아 있으며, 번역 메모리는 서로 다른 벤더가 만든 번역으로 중복되어 있을 수 있다. 지역팀에서 승인한 변경이 본사의 중앙 자산에는 반영되지 않거나, 새 벤더가 최신 파일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오래되고 부정확한 자산은 아무 자료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번역가와 벤더는 공식 자료이기 때문에 신뢰하지만, 그 안의 정보가 이미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언어 자산을 실제 자산으로 만들려면 최소한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자산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 누가 변경을 승인하는가?
  • 어떤 버전이 최신인가?
  • 변경 사항은 번역가와 벤더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 지역팀과 리뷰어의 피드백은 어디에 반영되는가?
  •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번역은 어떻게 폐기하는가?
  • 회사나 벤더가 바뀌어도 자산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가?

자산 관리는 문서를 한 번 만드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번역과 리뷰에서 나온 결정을 다시 시스템에 돌려보내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언어 자산은 번역가의 일을 줄이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가와 리뷰어, 벤더, 클라이언트의 로컬라이제이션, 지역팀, 제품팀이 같은 기준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조직의 기억에 가깝다. 이 기억이 없다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같은 용어를 다시 논의하고, 같은 질문에 다시 답하며, 이전에 수정했던 오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담당자나 벤더가 바뀔 때마다 제품의 목소리도 함께 달라질 수 있다.

 

로컬라이제이션에서 MT와 AI의 활용이 늘어날수록 언어 자산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진다. AI는 자연스러운 문장을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특정 회사가 어떤 기능명을 승인했는지, 사용자에게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하는지, 과거의 어떤 번역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지는 스스로 알지 못한다. 명확하고 최신 상태의 자산이 없으면 AI는 더 빠른 속도로 서로 다른 표현을 만들어낼 뿐이다.

 

좋은 번역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한다. 잘 관리된 언어 자산은 그다음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지 않도록 한다.

 

번역 프로젝트가 문장을 남긴다면, 성숙한 로컬라이제이션 프로그램은 기억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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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

→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 #7 언어 자산 - 스타일 가이드(Style Guide)

#3
 

처음 프리랜서 번역가 일을 시작했을 때, 내게 로컬라이제이션 업계란 번역가와 번역 회사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클라이언트가 번역 회사에 일을 맡기면, 번역 회사가 번역가에게 파일을 보내고, 번역가는 정해진 날짜까지 번역을 마쳐 돌려준다. 적어도 당시 내가 볼 수 있었던 범위에서는 대략 그런 구조였다.
 
물론 실제로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사람, 작업자를 섭외하는 사람, 파일과 일정을 관리하는 사람, 번역을 검수하는 사람, 품질 기준을 만드는 사람, 실제 기기에서 제품을 테스트하는 사람까지. 하나의 번역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최종 납품되기까지, 번역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여러 사람이 움직인다.
 
나 역시 처음에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업계에 발을 들였고, 이후 한국 번역 회사에서 풀타임 링귀스트로 일했다가, 게임 로컬라이제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글로벌 LSP에서 퀄리티 매니저를 맡기도 했다. 같은 벤더 사이드에 있으면서도 자리와 회사의 규모가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인다.
 
로컬라이제이션 업계의 플레이어들을 살펴보는 첫 번째 글에서는 그중 벤더 사이드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벤더란 무엇이고, 그 안에서는 누가 무슨 일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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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회사보다 조금 넓은 이름, LSP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아 번역과 로컬라이제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흔히 벤더(Vendor)라고 부른다. 언어 서비스 제공업체(Language Service Provider), 줄여서 LSP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일상적인 표현으로는 번역 회사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다만 LSP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텍스트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보다 훨씬 넓다.
 
번역된 내용을 검수하고, 번역 메모리와 용어집을 관리하고, 문서의 레이아웃을 조정하고, 제품 안에서 번역이 제대로 표시되는지 테스트한다. 프로젝트에 따라 자막과 더빙, 통역, 트랜스크리에이션, 기계 번역 후편집(Machine Translation Post-Editing, MTPE), 다국어 콘텐츠 제작과 데이터 서비스 등도 제공한다.
 
LSP의 크기와 형태 또한 천차만별이다. 대표적인 글로벌 LSP로는 RWS, TransPerfect, Welocalize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단순 번역을 넘어 소프트웨어와 웹사이트 로컬라이제이션, 콘텐츠 제작, 테스팅, 통역과 번역 기술 등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매출이나 회사 규모도 상당한 수준이다. 게임 분야에서는 Keywords Studios가 대표적인 예다. 게임 텍스트 번역뿐 아니라 오디오 로컬라이제이션, 더빙과 LQA 등 게임 출시 과정에 필요한 여러 서비스를 함께 제공한다. 그 밖에도 미디어, 생명과학, 법률, 특허처럼 특정 산업에 강점을 둔 업체들이 있다.

 

글로벌 규모의 MLV, 지역 전문 SLV

통상 수십 개 이상의 언어를 통합하여 관리하는 업체는 MLV(Multi-Language Vendor), 특정 언어나 지역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업체는 SLV(Single-Language Vendor)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게임사가 신작을 20개 언어로 동시에 출시하려 한다고 해보자. 게임사가 20개 언어의 번역가와 리뷰어를 직접 찾고, 각각 계약하고, 파일과 질문, 일정과 비용을 따로 관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고 콘텐츠가 계속 업데이트되면 이 구조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이때 MLV가 중간에서 여러 언어를 통합 관리한다. 클라이언트는 하나의 MLV에 콘텐츠를 전달하고, MLV는 언어별 팀을 구성해 번역과 검수, 품질 관리와 납품을 조율한다. MLV가 내부 링귀스트나 프리랜서에게 직접 작업을 맡기기도 하고, 특정 언어는 현지 SLV에 다시 의뢰하기도 한다.
 
SLV는 한 언어나 특정 지역 시장에 깊은 전문성을 가진다. 한국어 SLV라면 한국어 번역가와 리뷰어를 직접 관리하고, 한국 시장과 문화, 언어적 특성을 바탕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클라이언트나 MLV가 한국어 번역을 의뢰하면, SLV가 실제 언어 작업과 품질을 책임지는 구조다.
MLV의 강점이 여러 언어를 일관된 프로세스로 운영하는 규모와 관리 능력이라면, SLV의 강점은 해당 언어와 시장에 대한 깊은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 공급망은 항상 둘 중 하나로 깔끔하게 나뉘지는 않는다. 대형 MLV가 일부 언어에 대해 사내 팀을 운영하면서 다른 언어는 SLV에 맡길 수 있다. SLV가 자체 직원과 프리랜서를 함께 활용하기도 한다. 클라이언트가 주요 언어는 SLV와 직접 작업하고, 나머지 언어는 MLV를 통해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 클라이언트가 하나의 회사에 일을 맡겼다고 해서 모든 작업이 그 회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SLV의 링귀스트로 처음 본 세계

내가 처음 회사에 소속되어 일한 곳은 SLV였고, 그곳에서의 직책은 링귀스트(Linguist)였다.
 
링귀스트라는 이름은 회사마다 조금씩 다른 역할을 가리킨다. 직접 번역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다른 번역가가 작업한 내용을 리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클라이언트의 용어와 스타일을 관리하고, 프리랜서 번역가의 질문에 답하거나 품질 피드백을 제공하기도 한다. 내가 있던 자리에서도 번역은 업무의 중요한 일부였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여러 번역가가 작업한 결과물을 검토하고, 프로젝트 전체에서 용어와 문체가 일관되게 유지되는지 살펴야 했다. 명확하지 않은 원문은 프로젝트 매니저를 통해 클라이언트에게 질문하고, 답변이 오면 기존 번역과 앞으로의 작업에 반영했다.
 
번역가로 일할 때는 주어진 파일과 내 번역에 집중했다면, SLV의 링귀스트가 된 뒤에는 한 언어의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더 넓은 과정을 보게 되었다. 내가 고친 문장 하나가 다음 프로젝트의 기준이 될 수 있었다. 리뷰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가 있다면 개별 문장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용어집이나 스타일 가이드를 수정해야 했다. 번역가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면 어느 하나를 선택해 전체 팀에 공유할 기준을 만들어야 했다. 사람이 바뀌고 콘텐츠가 늘어나도 같은 기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체계가 함께 필요한 것이다.

 

문장을 만드는 사람, 번역가

사용자가 읽는 문장의 기초를 만드는 사람은 번역가다.
번역가는 원문의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 그러나 의미만 틀리지 않게 옮긴다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제품의 사용자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인지, 기존에 사용한 용어와 일치하는지, 브랜드가 추구하는 말투와 어울리는지, 화면 안에 들어갈 만한 길이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다루는 콘텐츠에 따라 필요한 능력도 달라진다. 법률 문서는 정확성과 전문 용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케팅 문구는 원문의 단어보다 의도와 인상을 살리는 일이 중요할 수 있다. 게임 대사는 캐릭터의 성격과 세계관을 이해해야 하고, 소프트웨어 문자열은 실제 기능과 화면상의 맥락을 알아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다.
 
번역 결과물만 보면 한 문장을 만드는 일이 짧아 보인다. 그러나 좋은 문장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조사와 판단이 있다.

 

또 다른 눈으로 번역을 보는 사람, 리뷰어와 랭귀지 리드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는 번역가의 작업이 끝난 뒤 다른 언어 전문가가 번역을 검토한다. 이 역할은 리뷰어(Reviewer), 에디터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리뷰어는 오역과 누락, 문법 오류를 확인한다. 용어집과 스타일 가이드가 제대로 적용됐는지, 여러 문장 사이에 일관성이 유지되는지도 살핀다. 여러 번역가가 하나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면 각자의 표현을 조정해 전체 결과물이 하나의 목소리로 읽히도록 만드는 역할도 한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에는 랭귀지 리드(Language Lead)리드 링귀스트(Lead Linguist)가 한 언어의 전반적인 품질을 책임지기도 한다. 이들은 개별 프로젝트의 리뷰뿐 아니라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오류를 분석하고, 용어집과 스타일 가이드를 업데이트하며, 번역가에게 피드백을 제공한다. 클라이언트의 언어 담당자와 품질 기준을 논의하거나 새로운 번역가를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 제품 안에서 언어를 확인하는 사람, LQA 테스터

번역과 리뷰가 끝났다고 해서 로컬라이제이션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 파일에서는 올바르게 보이던 문장도 실제 제품 안에 들어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문장이 버튼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줄바꿈 때문에 의미가 어색해질 수 있다. 번역되지 않은 영어가 남아 있기도 하고, 올바르게 번역된 문장이 엉뚱한 화면에 표시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를 확인하는 것이 LQA(Localization Quality Assurance 또는 Linguistic Quality Assurance) 테스터다. 게임 LQA 테스터라면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며 번역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인한다. 캐릭터의 성별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표현, 화면에서 잘린 문장, 잘못된 자막 타이밍과 깨진 문자 등을 찾는다. 문제가 발견되면 스크린샷과 재현 방법, 발생 위치와 심각도를 버그 추적 시스템에 기록한다. 수정 사항이 적용된 뒤 문제가 제대로 해결됐는지 다시 확인하는 리테스트도 수행한다.
 
LQA는 번역 파일을 읽고 검수하는 리뷰와 다르다. 리뷰어가 주로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하며 언어 품질을 확인한다면, LQA 테스터는 실제 제품과 사용자 경험 안에서 번역을 확인한다. 번역 자체는 맞지만 화면의 기능과 어울리지 않는 문제는 LQA 단계에서야 발견될 수 있다.
 
게임이나 앱을 특정 기기에서 직접 테스트하는 업무도 있다. PC뿐 아니라 콘솔, 스마트폰과 태블릿 등 여러 플랫폼에서 제품을 실행해 언어와 화면이 올바르게 표시되는지 확인한다. 언어별 설정, 지역별 스토어와 결제 환경, 기기의 화면 크기와 운영체제에 따라 서로 다른 문제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적 숙련도가 더 많이 요구된다.

 

품질을 문장 너머에서 보는 사람, 퀄리티 매니저

SLV에서 링귀스트로 몇 년 동안 일한 후, 나는 게이밍 로컬라이제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MLV로 옮겨 퀄리티 매니저(Quality Manager)로 일했다. 한 언어의 개별 문장을 가까이에서 보던 자리에서 여러 언어와 프로젝트의 품질을 더 넓게 바라보는 자리로 이동한 셈이다.
 
퀄리티 매니저의 일도 회사와 프로젝트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번역 품질을 일정한 기준으로 관리하고 개선하는 역할이다. 납품된 번역에서 어떤 오류가 발생했는지 분석하고, 그 문제가 한 번의 실수인지 프로세스상의 반복적인 문제인지 판단한다.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을 언어 팀에 전달하고, 필요한 경우 시정 조치와 품질 개선 계획을 만든다. 번역가와 리뷰어의 성과를 평가하거나 테스트를 통해 새로운 작업자를 선정하기도 한다.
 
품질을 측정하는 기준을 설계하는 일도 중요하다. 오역, 용어 오류, 문법, 스타일, 일관성 등 오류의 유형을 나누고 심각도를 판단한다. 같은 오류라도 게임 진행을 막는 잘못된 안내와 눈에 잘 띄지 않는 문장 부호 오류의 영향은 같지 않다. 숫자로 나타난 품질 점수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오류가 실제 사용자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살펴야 한다. 즉, 품질 문제를 직접 고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문제를 발견하고 원인을 분석해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를 만드는 사람에 가깝다.

 

번역이 가능한 환경을 준비하는 사람, 로컬라이제이션 엔지니어

로컬라이제이션 결과물에서 발견되는 문제가 항상 언어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원본 파일이 잘못 구성되어 번역할 문장이 누락될 수도 있고, 시스템이 특정 문자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번역문에 포함된 태그가 손상되거나 파일을 다시 제품에 넣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로컬라이제이션 엔지니어(Localization Engineer)는 번역할 파일을 분석하고 작업 가능한 형태로 준비한다. 번역이 필요하지 않은 코드나 태그를 보호하고, 번역이 끝난 파일을 원래 형식으로 되돌린다.
 
번역 툴과 자동화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파일에서 발생한 기술적 오류를 해결하기도 한다. 반복 작업을 줄이는 스크립트나 툴을 만들고, 클라이언트의 콘텐츠 시스템과 번역 관리 시스템을 연결하는 업무를 맡을 수도 있다. 프로세스가 자동화될수록 엔지니어의 역할이 줄어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동화된 시스템을 설계하고 예외를 처리할 기술적 전문성이 더 중요해진다.

 

프로젝트의 교차로에 서 있는 사람, 프로젝트 매니저

벤더에서 클라이언트와 번역가 사이를 가장 활발하게 오가는 사람은 대개 프로젝트 매니저(Project Manager), 줄여서 PM이다. 클라이언트로부터 작업 요청을 받으면 PM은 먼저 프로젝트의 범위를 확인한다. 어떤 콘텐츠를 몇 개 언어로 번역해야 하는지, 마감은 언제인지, 어떤 툴과 작업 지침을 사용해야 하는지 살핀다. 파일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언어별 작업자를 배정하고, 견적과 일정을 관리한다.
 
작업이 시작된 뒤에도 PM의 일은 계속된다. 번역가가 보낸 질문을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고, 클라이언트의 답변을 다시 여러 언어 팀에 공유한다. 원문이나 일정이 변경되면 그 영향을 파악해 관계자들에게 알린다. 작업이 늦어지거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면 대안을 찾아야 한다. 번역과 리뷰가 끝난 뒤에는 모든 파일이 빠짐없이 준비됐는지 확인하고 결과물을 납품한다.
 
한 PM이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오전에는 앱 업데이트 번역을 보내고, 그사이 급하게 들어온 마케팅 문구의 견적을 준비하고, 오후에는 어제 납품한 문서에서 발견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수도 있다. 클라이언트는 일정이 중요하고, 번역가는 충분한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리뷰어는 용어가 일관되지 않다고 말하고, 엔지니어는 파일 형식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요구가 PM에게 모인다. 그래서 벤더 PM의 역할은 단순히 파일을 전달하고 회수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에게 흩어진 정보와 일정을 연결해 프로젝트가 멈추지 않도록 하는 일에 가깝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만큼이나 커뮤니케이션과 문제 해결 능력이 중요한 이유다.

 

프로젝트보다 큰 단위를 관리하는 사람들

프로젝트가 커지면 일상적인 작업을 관리하는 PM 외에 더 넓은 범위를 책임지는 역할이 필요해진다. 프로그램 매니저(Program Manager)나 프로덕션 매니저(Production Manager)는 하나의 요청이 아니라 특정 클라이언트의 여러 프로젝트 또는 전체 로컬라이제이션 프로그램을 관리한다.
 
여러 PM과 언어 팀의 업무량을 조정하고, 장기적인 일정과 인력 계획을 세운다. 비용과 생산성, 납기와 품질 지표를 살피고 반복되는 문제를 개선한다. 새로운 프로세스나 툴을 도입하고, 클라이언트와 정기적으로 운영 성과를 검토하기도 한다. PM이 오늘 들어온 프로젝트를 무사히 납품하는 데 집중한다면, 프로그램 매니저는 앞으로도 그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구조인지 살피는 쪽에 가깝다.
 
규모가 큰 벤더에는 여러 프로그램이나 지역 조직을 총괄하는 오퍼레이션 매니저, 포트폴리오 매니저 또는 디렉터급 역할도 존재한다. 직책의 이름과 업무 범위는 회사마다 다르지만, 올라갈수록 개별 파일보다 사람과 조직, 예산과 장기 전략을 다루는 비중이 커진다.

 

사람과 프로젝트를 연결하는 사람, 벤더 매니저

여러 언어와 프로젝트를 운영하려면 적절한 작업자를 미리 찾고 관리해야 한다. 이를 담당하는 역할이 벤더 매니저(Vendor Manager), 리소스 매니저(Resource Manager) 또는 탤런트 매니저(Talent Manager)다. 여기서 벤더는 LSP 전체를 의미할 때도 있지만, 회사가 업무를 맡기는 프리랜서와 외부 업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벤더 매니저는 프로젝트에 필요한 언어와 분야의 번역가, 리뷰어와 테스터를 찾는다. 이력과 경력을 검토하고 테스트를 진행하며, 단가와 계약 조건을 협의한다. 작업을 시작한 뒤에는 성과와 가용 인력을 관리한다. 특정 언어에 일이 갑자기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미리 작업자를 확보하고, 품질이나 납기 문제가 반복되는 작업자가 있다면 개선 방안을 논의하거나 다른 인력을 찾아야 한다.
 
좋은 작업자를 찾는 것만큼 그들이 계속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무리한 일정과 낮은 단가, 불명확한 피드백이 반복되면 경험 많은 언어 전문가를 유지하기 어렵다. 벤더 매니지먼트는 명단에 이름을 많이 등록하는 일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맞는 전문 인력을 장기적으로 구축하는 일이다.

 

클라이언트의 창구, 어카운트 매니저

벤더에는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사람만큼이나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관리하는 사람도 중요하다. 대표적인 역할이 어카운트 매니저(Account Manager)다.
 
PM이 이미 들어온 프로젝트를 일정에 맞춰 수행하는 데 집중한다면, 어카운트 매니저는 클라이언트와 더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비즈니스 요구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둔다. 클라이언트가 어떤 시장과 제품을 준비하고 있는지, 현재 로컬라이제이션 과정에서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파악한다. 그에 맞는 서비스와 운영 방식을 제안하고, 견적이나 계약 조건을 논의한다.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일도 담당한다.
 
규모가 큰 주요 고객에게는 여러 PM과 품질 담당자, 엔지니어가 하나의 팀처럼 배정될 수 있다. 어카운트 매니저는 클라이언트와 이 내부 팀을 연결하고, 문제가 커졌을 때 조정하거나 해결의 방향을 논의한다. 회사에 따라 클라이언트 서비스 매니저(Client Services Manager), 비즈니스 디벨롭먼트 매니저(Business Development Manager), 세일즈 매니저 등의 직책이 일부 비슷하거나 더 세분화된 업무를 맡는다.

 

벤더 사이드의 진로

로컬라이제이션 업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직업으로 시작해 어디로 성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생각보다 진로는 다양하다. 
 
언어 중심의 커리어라면 프리랜서 번역가나 주니어 링귀스트로 시작해 리뷰어, 시니어 링귀스트, 랭귀지 리드 또는 랭귀지 매니저나 퀄리티 매니저로 성장할 수 있다.
 
프로젝트 운영에 관심이 있다면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나 주니어 PM으로 시작해 프로젝트 매니저, 시니어 PM, 프로그램 또는 프로덕션 매니저, 오퍼레이션 매니저와 디렉터로 범위를 넓혀갈 수 있다.
 
클라이언트 관계와 비즈니스에 강점이 있다면 PM 경험을 바탕으로 어카운트 매니저, 클라이언트 서비스 매니저나 비즈니스 디벨롭먼트 역할로 이동할 수 있다.
 
테스팅 분야에서는 LQA 테스터로 시작해 시니어 테스터, 테스트 리드, LQA 프로젝트 매니저나 테스트 매니저로 성장하는 경로가 있다.
 
기술에 관심이 있다면 로컬라이제이션 엔지니어, 자동화 엔지니어나 로컬라이제이션 솔루션 설계자로 전문성을 키울 수 있다.
 
한 트랙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번역가가 PM이 되기도 하고, LQA 테스터가 퀄리티 매니저로 이동하기도 한다. PM이 어카운트 매니저나 벤더 매니저가 될 수도 있다. 벤더에서 경험을 쌓은 뒤 클라이언트의 로컬라이제이션팀으로 옮기는 경우도 흔하다.

나 역시 프리랜서 번역가에서 출발해 SLV의 링귀스트가 되었고, 이후 MLV의 퀄리티 매니저 자리를 거쳐 클라이언트 사이드로 옮긴 경우.  그러나 다음 자리로 이동할 때마다 이전 경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쓰였다.
 
그래서 로컬라이제이션의 커리어를 직선보다 지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언어, 프로젝트 운영, 품질, 테스팅, 기술과 클라이언트 관리라는 여러 방향이 있고, 자신의 강점과 관심에 따라 다른 길로 이동할 수 있다. 두 개 이상의 영역을 이해하는 경험이 많은 경우에는 강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벤더에서 바라본 로컬라이제이션

벤더에서 가장 가까이 보이는 것은 납기와 품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클라이언트가 정한 출시 일정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실제 번역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원문의 확정이 늦어지면서 줄어들기도 한다. 작업량은 갑자기 늘고, 중요한 참고 자료가 뒤늦게 도착하기도 한다.
 
그럴 때 벤더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작업자를 추가할지, 우선순위를 나눌지, 일부 단계를 동시에 진행할지 판단한다. 시간이 부족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투입하고 싶어지지만, 참여자가 늘어나면 일관성을 관리하기 어려워진다. 속도와 비용, 품질 가운데 어느 하나만 생각해서는 프로젝트를 운영할 수 없다.
 
번역가로 일할 때는 번역에 필요한 정보가 왜 처음부터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지 궁금했다. 링귀스트가 된 뒤에는 나 역시 클라이언트의 답변을 기다리는 중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퀄리티 매니저로 일하면서는 한 프로젝트에서 발생한 오류가 반드시 그 문장을 번역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더 자주 보게 되었다. 불분명한 원문, 오래된 용어집, 촉박한 일정, 적합하지 않은 작업자 배정, 여러 언어에 제대로 공유되지 않은 답변이 최종 오류로 나타날 수 있었다. 품질을 개선하려면 결과물만 고칠 것이 아니라 결과물이 만들어진 과정 전체를 살펴야 했다.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클라이언트는 왜 원문이 확정되기도 전에 출시일을 정할까. 번역이 진행 중인데 왜 제품은 계속 바뀔까. 로컬라이제이션팀에서 결정을 내려주면 될 것 같은 질문에 왜 여러 부서의 확인이 필요할까.
 
그 답은 클라이언트 사이드로 자리를 옮긴 뒤에야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벤더에게 하나의 작업을 보내기 전, 클라이언트 안에서는 이미 여러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로컬라이제이션팀 역시 그 복잡한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다.
 
다음 글에서는 테이블의 반대편, 클라이언트 사이드의 플레이어들을 살펴보려 한다.
 
 
 
다음 이야기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 #4 로컬라이제이션 업계의 플레이어들 - 클라이언트 사이드(Client Side)

#2
 

"무슨 일 하세요?"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꼳 듣게 되는 질문이다. 이제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로컬라이제이션 일을 합니다."
라고 답하면, 높은 확률로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게 무슨 일이에요?"
그러면 나는 기꺼이, 어떤 사명감까지 가지고 주절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번역이랑은 조금 다르고, 글로벌 제품을 여러 언어와 문화에 맞게 현지화하는 과정이고, 번역뿐 아니라 품질 관리와 프로세스, 기술적인 부분도 함께 다루고,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듣는 사람은 별 관심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피곤한 경우를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면 그 사명감도 늘 버티진 못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대충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길 때도 있는데, 사실 가장 효과가 좋은 답은 따로 있다.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경우 내가 바라던 대로 대화는 거기서 끝난다. 사실은 거기서부터 시작인데도.
 

*

번역이 시작되기 전, 그리고 끝나고 난 자리

많은 사람들이 번역과 로컬라이제이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영어가 한국어로 바뀌어 있으면 ‘번역됐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두 개념은 엄밀히 다르다.
 
번역(Translation)은 텍스트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말한다. 반면 현지화/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 또는 l10n((l과 n 사이에 알파벳이 10개)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특정 국가와 문화에 자연스럽게 맞추는 전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번역은 그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 중 하나이지만, 전체는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만든 새로운 운동 앱을 전 세계 시장에 출시한다고 가정해 보자. 가능한 한 많은 언어를 지원하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어떤 국가를 먼저 출시할지, 어떤 언어를 지원할지, 앱 전체를 현지화할지 아니면 마케팅 자료나 핵심 기능부터 번역할지 같은 결정은 시장 규모, 사용자 수, 비즈니스 전략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함께 제품은 처음부터 여러 언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야 한다. 영어 텍스트를 코드에 직접 입력하지 않고 분리해 관리하고, 날짜와 시간, 숫자, 통화, 주소 형식 등이 국가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를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 줄여서 i18n(i와 n 사이에 알파벳이 18개)이라고 부른다.
 
그다음에야 실제 번역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번역이 끝나도 바로 출시하지는 않는다. 앱 화면에서 문장이 잘리지 않는지, 버튼이 깨지지는 않는지, 각 언어가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표시되는지, 날짜나 통화 표기가 해당 국가의 관습에 맞는지 등을 테스트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문제가 발견되면 다시 수정하고, 다시 테스트를 거친 뒤에야 사용자에게 제품이 전달된다.
 

 
위의 사이클은 간단히 구성한 로컬라이제이션의 단계인데, 기본적인 예시일 뿐 제품/서비스의 특성이나 기업마다 변주는 존재한다. 그럼 이제 자연스럽게 들게 되는 의문은, 이 모든 일을 누가 하느냐이다. 
 

단계 플레이어
① 분석 및 계획 클라이언트 (Localization PM, Program Manager, Product Manager, Marketing 등)
② 인터내셔널라이제이션(i18n) 클라이언트 (개발자, Software Engineer, UX Designer 등)
③ 번역 벤더(LSP) 또는 프리랜서 번역가
④ 검수 및 QA 벤더(LSP)의 리뷰어/언어 전문가 (번역 벤더와 다른 업체인 경우 多)
⑤ 테스팅 / QA 클라이언트 QA팀 또는 QA 전문 벤더(번역/리뷰 벤더와 다른 업체인 경우 多)
⑥ 납품 및 배포 클라이언트 (개발팀, Release Manager, DevOps 등)

 
물론 실제 사례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다. 어떤 기업은 번역부터 QA까지 하나의 로컬라이제이션 벤더에 맡기기도 하고, 어떤 기업은 번역, 리뷰, 테스트를 각각 다른 업체에 맡기기도 한다. 또한 대규모 테크 기업은 번역을 제외한 상당수 과정을 내부 팀에서 직접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클라이언트가 제품과 전략을 책임지고, 벤더가 언어와 품질을 지원하는 구조를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나 역시 벤더와 클라이언트 양쪽에서 모두 일해 보며, 같은 '로컬라이제이션'이라는 단어 안에서도 역할과 관점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업계를 이루는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각자의 역할을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

 
 
다음 이야기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 #3 로컬라이제이션 업계의 플레이어들 - 벤더 사이드(Vendor Side)

 

#1

 
누구나 자신의 커리어와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에게는 지금이 그런 시기인가 싶다.
 

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 번역으로 일을 시작한 뒤 벤더와 클라이언트 사이드를 거치며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을 로컬라이제이션 업계에서 보냈다. 그동안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더 넓은 경험을 쌓고, 내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앞을 향해 걸어왔다. 자연스럽게 경험을 기록하거나 누군가와 나눌 여유는 많지 않았다. 특히나 한국어로는 더더욱.
 
한국에서 일할 때도 그랬지만, 미국으로 와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여실히 느낀 점이 있다.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데, 정작 한국어로 로컬라이제이션을 이야기하는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 번역 툴을 소개하거나 개별 기술을 설명하는 자료는 있지만, 로컬라이제이션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 왜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지, 현업에서는 어떤 고민을 하는지를 풀어낸 이야기는 쉽게 찾기 어려웠다.
 
물론 나 역시 이 분야를 모두 알지 못한다. 지금도 매일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문제를 만나고,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더구나 로컬라이제이션은 AI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 동안 보고 배우고 고민했던 것들을 조금씩 기록해 두는 일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시리즈,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기술적인 지침서나 거창한 커리어 길라잡이가 되려는 건 아니다. 번역과 로컬라이제이션은 무엇이 다른지, 글로벌 제품은 어떻게 여러 언어로 출시되는지, 번역 품질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AI는 이 업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까지. 현업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품게 된 질문들을 하나씩 함께 살펴보는 기록이 되었으면 한다. 로컬라이제이션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게는 이 업계를 이해하는 데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잠시 생각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 지난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다음 이야기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 #2 번역과 로컬라이제이션, 뭐가 다를까

 

학부생 시절, 나는 전공이 통번역이었음에도 (아니 어쩌면 전공이 통번역이었기 때문에) 그 기술이 구현되는 업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번역이란 그저 한 사람의 고독한 번역가가 머리를 뜯으며 작업을 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고 그 멋에 푹 빠져 있었기에 Localization (또는 L10N) 업계에 대해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후에 프리랜서로 번역도 해보고 본격적으로 업계에 발을 들이면서 L10N에 관한 더 많은 인사이트를 얻고자 찾아보아도 그렇게 많은 리소스가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래에 소개할 매거진과 팟캐스트는 적어도 내가 지난 몇 년 접한 바로는 업계 입문자나 단순히 L10N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몇 없는 리소스이다. 그나마 팟캐스트 The Loc Show는 에피소드가 10개 남짓한 신생 프로그램이다.ㅋ

 

 

물론 넓은 범위에서 번역/통역, 로컬라이제이션을 다루는 매거진이나 아티클은 여럿 존재하지만, 이 업계의 소식과 인사이트만을 다루는 매거진은 극히 드물고 그중에서 만듦새까지 괜찮은 리소스는 더욱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MultiLingual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격월로 발행되는 매거진은 발행 간격이 조금 길다는 점, 최근에는 디지털 에디션만 발행된다는 점 등이 아쉬워도 L10N에 종사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는(?) 귀한 리소스이다. multilingual.com의 홈페이지로 접속하면 매거진은 물론 각종 업계 관련 소식이나 이벤트 등도 확인할 수 있고 전 세계의 언어 서비스 제공업체들도 둘러볼 수 있다.

 

 

multilingual.com home
Multilingual Digital Archives

 

https://multilingual.com/

 

 

 

함께 소개할 팟캐스트 프로그램은 불과 두 달 전쯤 서비스를 시작한 따끈따끈한 프로그램인데, Smartling이라고 하는 온라인/클라우드 기반 번역 툴 및 언어 서비스 제공업체에서 론칭했다. 바로 위에서 소개한 Multilingual 매거진 최신호에서 광고를 보고 다운로드한 감상평은, 내가 접했던 로컬라이제이션 업계를 소개하는 콘텐츠 중 가장 유익하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혹여 내가 모르는 다른 콘텐츠가 이미 존재하는데 게으른 탓에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주로 이 업계에 종사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대해 대담을 나누며 로컬라이제이션 과정, 마주하는 어려움과 해결책, 성공 사례 등등을 공유하는데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이 업계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강추하고 싶은 팟캐스트이다.

 

 

The Loc Show by Smartling

 

https://www.smartling.com/podcasts/locshow/?utm_source=Paid+-+Digital+Advertising&utm_medium=MultiLingual&utm_term=The+Loc+Show&utm_content=The+Loc+Show&utm_campaign=2020+Q2+All%3A+The+Loc+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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