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나 시간을 다루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질서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졌다. 『메멘토』에서는 기억의 질서였고,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의 질서였으며, 『오펜하이머』에서는 역사의 질서였다. 그리고 『오디세이』에서 그가 마주하는 것은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실패에는 교훈이 있고, 고난에는 목적이 있으며, 비극에도 결국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때로 알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고. 오디세우스에게 닥치는 시련들도 그렇다. 폭풍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동료들은 허무하게 죽으며, 신들은 인간의 도덕과는 다른 논리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오디세우스의 지혜도, 영웅성도 아니다. 끝까지 약속을 붙드는 그의 태도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다. 죽은 전우들을 기억하는 의무를 버리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잊지 않으며, 왕으로서의 책임도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수없이 실패하고 흔들리지만, 결국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신의를 지키려는 의지다. 단순히 계약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로 했는가."

 

그 질문에 끝까지 책임지는 삶이다. 운명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자신의 약속만큼은 배신하지 않는 것. 놀란은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자유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신의는 인간 사이에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도 신의가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 신들은 결코 완전한 정의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변덕스럽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잔인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제사를 드리고, 맹세를 지키며, 신을 향한 경외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음에도 신뢰하는 것인가.

 

놀란은 이 주제를 자신의 특유의 연출 방식으로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그는 관객에게 모든 퍼즐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보는 것만 보여 주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끝까지 알 수 없는 채로 남겨 둔다. 덕분에 관객 역시 오디세우스와 같은 위치에 놓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다만 다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 체험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다. 삶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성된 대본을 받아본 적이 없고, 쪽대본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영웅의 승리를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신의를 잃지 않는 사람에 대한 찬가다. 운명의 장난 앞에서도 누군가는 약속을 지키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누군가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남기 위해.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이 <오징어 게임>에 이어 전 세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공개된 다음날 밤, 6개의 에피소드를 앉은 자리에서, 아니 누운 자리에서 모두 끝냈다. 눈을 뗄 수 없는 정도였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눈을 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니 이 시리즈에 SF/판타지적 볼거리와 비주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또는 2% 부족한 이야기의 매끄러움이나 클리셰로 일부 장면에서는 스킵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이 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연상호 감독의 웹툰 원작 드라마 <지옥>은 생각을 멈추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출처: 넷플릭스

 

천사(대탈출 악령감옥 편의 대두 귀신...?)가 나타나 이름을 부르며 몇날 몇시에 죽는다는 고지를 한다. 그 날 그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건장한 지옥의 사자들이 찾아와 고지를 받은 사람을 우선 후들겨 패며 고통을 준 후 눈부신 빛을 쏘며 태워 죽인다. 이를 시연이라 한다. 문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는 것이다. 새진리회와 의장 정진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직접적인 죄를 심판하고 메세지를 전하기 위한 신의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그러나 중반 이후, 반전과 함께 이야기는 궤를 달리 한다. 사실 천사의 고지는 그 사람의 죄 유무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 공포와 반면교사로 유지되던 질서는 무너졌다. 사람들은 이제 생각해야 한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출처: 아마존

 

 

이 드라마 시리즈를 보고 나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던 소설. 바로 나의 최애 작가 테드 창의 단편 <지옥은 신의 부재> (원제: Hell is the Absence of God)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영화 <컨택트>의 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담겨있다. 테드 창과 그의 소설에 관해 예찬하는 글을 꼭 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소설 이야기는 각설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라 생각하는 소설이 바로 <지옥은 신의 부재>. 

 

줄거리는 이렇다.

 

이 세상에서는 천사가 강림하고 지옥의 풍경이 불쑥 지상에 비춰진다. 천사는 무작위한 장소에 강림하며 그 여파로 누구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고 누구는 물리적인 피해를 입어 죽기도 한다. 그러나 생전에 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거의 대부분' 지옥에 간다. 다리에 장애를 갖고 태어난 주인공 닐은 어느 날 천사의 강림으로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었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 천국에 가야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닐. 그런데 천사 강림때 나타나는 천국의 빛을 보면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사 그 사람이 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잔혹한 흉악범이라도. 닐은 그 빛을 보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지옥>과 <지옥은 신의 부재> 두 작품은 동일한 근원적 질문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과 태도를 다르게 조명하기에 상당히 달라보이기도 하지만, 그 질문은 같다. 불행은 왜 일어나는가.

 

 

이쯤되면 이러한 테마의 원형격인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구약성경의 욥기. 그러니 테드 창이 인터뷰에서 해당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욥기'라고 밝힌 것도 이상하지 않다.

 

사탄과 하나님의 내기라는 다소 우화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욥기는 욥이라는 신앙심 깊은 부호가 자신은 이유를 알지 못하는 지독한 시련을 겪으며 그 답을 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뭔가 잘못이 있으니 그런 벌을 받는 거라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마음 속에 은연 중에 자리잡고 있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다그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복을 내려주며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출처: 위키아트

 

 

이해할 수 없는 불행과 고난이 선하고 악함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사실은 우리를 괴롭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종교나 과학의 힘을 빌려 이유를 찾을 수도 있고 이유 없는 불행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느 편이건, 너무 괴롭지 않았으면.

 

 

 

 

 

*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라"

 

어느 20년 전 자기계발서에서는 챕터 제목으로 쓰일 정도로 야심 찬 선언이었겠지만, 이제 그런 순간은 매일 찾아온다. 아니, 마음만 먹는다면 의지만 있다면 하룻밤 사이에도 평생 알고 살았던 세계보다 더 넓은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슬픈 의미로든.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타이거 킹'을 봤다. 세상은 넓고 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인간의 숫자 70억은 내 상상보다 훨씬 많은 수이며 그 수많은 사람 중 어떤 사람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일들도 내 상상력 밖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낀다. 도저히 다큐멘터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동시에 지독히도 미국스러운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는 기가 막혀 하다가, 그것을 오락으로 소비하며 쾌락을 느끼다가, 분노하다가, 동물들과 눈이 마주쳐 애통해하다가, 등장 인물들을 심판하다가, 그러기를 반복하며 머리가 아팠다.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그 부제만큼 명확하다. "MURDER, MAYHEM AND MADNESS"(한국어 부제는 '무법지대') 살인(의혹 또는 미수)과 광기로 얼룩진 대환장 쇼. 자극적인 이야기이다. 내가 동물권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져왔다고 다큐멘터리 시리즈 하나에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강요할 순 없으나, 이 이야기가 예컨대 '블랙피쉬'와 같은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호랑이가 아니다. 자신의 'G W 동물원'에서 사자, 호랑이 등 Big Cats를 기르며 돈을 버는 일명 조 이그조틱과 역시 사설 동물원의 운영자 겸 사이비 교주(?) 닥터 앤틀, 그리고 동물보호단체 ‘빅 캣 레스큐’의 대표로서 처음에는 막장 속 쉬어가는 착한 캐릭터인 줄로만 알았던 캐럴 배스킨. 특히 조 이그조틱과 개컬 배스킨의 머리채 싸움이 핵심이다. 당연히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것이다. 다만, 언뜻언뜻 서려 있는 소유욕에 대한 자극이 엉뚱한 음지의 붐을 일으키지만 않았으면 하는, 남의 나라 일에 대한 오지랖을 부려본다.

 

Two of 39 tigers rescued in 2017 from Joe Exotic’s G.W. Exotic Animal Park, now in the Wild Animal Sanctuary in Keenesburg, Colo. Credit...Marc Piscotty/Getty Images

 

회가 넘어갈수록 격해지는 진흙탕 싸움을 나도 속된 마음으로 '재미있게' 봤다고 고백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시리즈를 통해 이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되는 데에는 모든 에피소드가 필요하지 않았다. 1화에 등장하는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여전히 맴돈다.

 

"Captive tigers in the U.S. outnumber those in the wild."

 

몇 년 전 자료가 많고 정확한 수치는 집계하기 어렵지만, '전 세계'에 남은 야생 호랑이는 약 4,000마리, '미국'에서 사육 또는 애완용으로 길러지는 호랑이가 약 10,000마리라고 한다.

 

 

티븐 스틸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봤다. 두 번째 관람이다. 먼저는 아이맥스 3D로 봤고 이번에는 4D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4D 경험이 <드래곤 길들이기2>(2014)였으니 무려 4년 만에 두 번째 4D 극장을 방문한 셈이다. 그 후로,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판타지, SF, 액션 등 4D로 볼 수 있는 쟁쟁한 영화들이 있었지만 한번도 어떤 영화를 꼭 4D로  보고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같은 영화를 2D로 관람했을 때와 비교해 3D 관람이 줬던 영화적 즐거움과 감동(<아바타>와 <그래비티> 등)에 비해 3D와 비교해 4D 관람이 줄 수 있는 그것이 크지 않았다고 생각한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상영관과 스크린의 크기가 훨씬 작고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그렇게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4D 극장을 평생 두 번째로, 그것도 이미 한 번 본 영화를 보려 찾은 것이다.

흔히 이 영화를 두고 대중문화에 바치는 헌사, 그리고 지난 수십년 간 대중문화를 향유했던 세대에, 그 시절과 지금을 사는 덕후들에게 바치는 선물이라 표현한다. 대중문화를 향한 스필버그의 사랑, 그것이 가지는 힘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이 흘러 넘쳐 전달되는 감동은 울림이 상당하다. 그러나 내게는 좀 다른 의미로도 선물 같은 영화다.


포스터부터 근사한 것이 마음을 흔든다.



내 중고등학생 시절, 심지어 대학 시절 초반까지 가장 많이 읽었던 소설의 장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 답은 '가상현실 게임 판타지'일 것이다. 사실 어디가서 자랑처럼 늘어놓기에는 멋쩍은 일종의 guilty pleasure지만. 고백하자면 못해도 서른 작품(대부분 판타지 소설이란 단권이 아니기 때문에 권수로 치자면 200권을 훌쩍 넘지 않을까) 이상의 소설을 읽었던 것 같다.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달빛 조각사> 등의 유명한 작품들은 물론 만화방, 책방에 가면 버젓이 책장 한 칸을 차지하던 가상현실 테마의 소설을 퀄리티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읽었으니. 유독 거기에 꽂혔던 이유를 하나만 꼽을 순 없을 것 같다. 현실 적응이 더뎠던 내 도피처이자 언젠가 실현 가능할 것만 같은, 아니 '실현이 거의 확실한 판타지'라는 사실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건담도 좋고 샤이닝도 좋다. 킹콩도 좋고 오락실 게임도 다 나도 향유했던 문화다. 그러나.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 가상현실 게임 덕후의 꿈을 현존 최고의 기술력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충족시켜주고자 발벗고 나선 감격스러운 작품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안에 담긴 무수한 대중문화 레퍼런스에 젖어들기도 전에, 주인공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가 자신의 아지트에서 헤드 기어 장치를 착용하고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 영화가 몹시 신선하고 새롭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익히 보아온 영웅 서사의 문법이며 스티븐 스필버그와 디즈니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주제와 메시지. 게다가 그동안 질리도록 본 가상현실 게임 소설들과 이야기 구조도 거의 흡사하다. 아니, 원작이 '가상현실 게임 소설'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우선 가상현실 게임의 실현은 꼭 엄청난 천재 한 명의 혁혁한 공로로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평범하다 못해 궁핍한 삶을 사는 주인공이 가상현실 게임에서 (대개 끈기, 성실함,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특별해지고 조력자들과 함께 (대기업, 국가 기관 등의 거대 세력이 단골로 등장하는) 악당의 마수에서 소중한 것과 게임 속 세상은 물론 현실의 세계를 지킨다.   


가상현실 세상 '오아시스'를 만든 천재 덕후 제임스 할리데이.


웨이드와 그의 친구들. 스필버그답게 인종 안배까지 골고루 한 팀원들. (사진엔 흑인 친구 한 명이 빠져있다)


영화의 악당으로 등장하는 대기업 I.O.I. 우연의 일치치고는 놀라운 작명 센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스필버그라서, 할리우드라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을 거의 만족시켜준 결과물이 나온 게 아닐까. 드문 일이다. 한 세계 혹은 세계관을 구현했다는 사실만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은. 그게 바로 덕후의 마음일까. 제법 오래 잊고 있던 내 어린 날의 로망이자 판타지가 영화를 통해서나마 구현된 것을 보고 있자니 어서 빨리 내가 직접 그 주인공이 되보고 싶은 낯뜨거운 욕심에 몸이 달아 두 번째 관람인 것이 무색할만큼 순식간에 영화의 끝을 다시 맞이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영화의 계절감이 강렬히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책을 봐도 그렇고 음악을 들어도 그렇다. 그런 힘이 좋은 영화, 좋은 책, 좋은 음악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순 없지만, 충분 조건이기엔 분명하다. 삼천포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어떤 계절의 향수를 불러오는 영화보다 그런 힘을 가진 글과 음악이 훨씬 더 많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계절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인 시각으로 투사할 수 있는 영화가 가장 유리한 매체일 것 같은데도. 단순한 추측을 하자면 노출 빈도가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봄을 이야기한 혹은 배경으로 한 그 어떤 책과 영화가 만들어진들 "벚꽃엔딩"의 그 엄청난 환기력을 능가할 수 있기란 쉽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시작은 계절감을 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의 더 큰 범주는 퀴어영화다. 지금껏 내가 본 (넓은 의미의) 퀴어영화라봐야 두 손에 꼽을 수준인데, 재미있는 건 그 중 절반 가까이가 최근 2년 사이에 본 영화라는 사실이고 그 영화들이 모두 최근 2년 새 본 가장 훌륭한 영화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캐롤>을 본 직후 찾아본 <가장 따뜻한 색, 블루>(한국 개봉은 2014년)부터 <캐롤>, 그리고 <문라이트>와 <콜미 바이 유어 네임>까지. 이 영화들은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이 인정하는 퀴어영화의 어벤져스가 아닌가 싶다. 최근 나오는 퀴어영화들의 완성도가 높아진 건지 내가 그동안 몰랐던 건지는 모르겠다. 비슷해보여도 저마다 매력이 다른 네 편 모두 하고싶은 말이 많은 영화지만 이번에는 콜바유만 이야기하는 걸로.







사설이 길어졌지만 정말 콜바유의 얘기를 시작하자면, 안드레 애치먼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이 영화는 여름 로맨스극의 정석이라 불릴 만 하다. 게으른 탓에 더 근사한 사진을 싣지 못하지만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여름날 이탈리아의 풍광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무더운 여름날의 나른함과 무기력함이 영화의 초장을 감싼다. 학문의 목적으로 미국에서 자신의 스승이 있는 어느 이탈리아 시골 마을로 날아온 대학원생 올리버와 그가 6주간 머물 집에 사는 예술가 소년 엘리오의 첫만남은 그 여름날만큼이나 싱겁고 무기력하다.


그러고도 얼핏 지루해보이고 간지럽게 신경을 건드리는 두 남자의 감정을 향한 클로즈업과 와이드샷이 반복된다. 누구의 사랑에나 감정은 차곡차곡 쌓여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영화가 관객에게 사랑의 과정을 축구 중계하듯 보여주고 사랑의 감정을 관객에게 마구 들이미는지. 그러나 올리버와 엘리오는 오래도록 그 긴장의 끈을 양쪽에서 쥔 채 조심스런 줄다리기를 한다. 그리고 그 줄다리기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사랑의 대상이자 자아 발견의 대상이었기에 더 팽팽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감정의 중심에는 서로를 바라보고 탐구하는 조심스러운 시선에 있었다. 활달한 올리버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하는 엘리오와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쓰는 엘리오를 보는 올리버의 시선.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여성을 만나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 쉽게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멈춰서고 서로를 보는 시선. 그리고 마침내 올리버와 엘리오가 서로를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할 때, 그 감정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더 일찍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때쯤이면 영화는 관객에게 슬픈 예감을 안게 한다. 여름날의 무더위도 눈부심도 끝은 정해져 있듯이. 비록 그 예감은 반쯤은 맞았지만 또 반은 틀리다. 눈물의 작별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 올리버가 다시 돌아와 엘리오에게 청혼이라도 해야만 두 사람의 사랑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교류는 올리버에게, 그리고 짐작컨대 엘리오에게는 더 큰 여운과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올리버 역을 맡은 아미 해머의 연기도 물론 훌륭했지만 엘리오 역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는 그야말로 최고의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핫스타라는 말은 충분한 근거가 있는 말이지 않을까. 복잡한 감정들을 담아내는 그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궁금증이 들게 하고 해석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앞으로 이 배우가 또 어느 영화에서 어떤 모습을 선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된다 다음 행보가.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의심할 여지 없는 좋은 영화지만, 이 영화는 꼭 같이 언급해야겠다. 이미 오래 전에 본 영화에 대한 감상을 쓸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으니. 토드 헤인스 감독,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주연의 <캐롤>이다. 만약 내멋대로 지금껏 봐온 로맨스/멜로 드라마 영화의 순위를 매긴다면 이 영화는 세 손가락 안에 넉넉히 들어오지 않을까. 아름답고 품위 있으며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영화. 보는 순간, 그리고 보고나서도 한동안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영화이자 케이트 블란쳇에 대한 팬심을 절정에 달하게 한 영화. 콜바유와 닮은 점도 많지만 또 다른 분위기와 결말 등 다른 점도 많은 캐롤은 내 겨울의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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