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 #6 언어 자산(Linguistic Assets)
“지난번과 같은 표현으로 번역해 주세요.”
클라이언트가 새로운 번역 프로젝트를 요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난번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번역가가 다시 배정되었고, 이전 번역도 번역 메모리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품질과 스타일을 유지하기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작업을 시작하자 같은 기능이 세 가지 이름으로 나타난다. 어떤 문장에서는 ‘활동’, 다른 문장에서는 ‘액티비티’, 또 다른 곳에서는 ‘운동’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기존 번역은 ‘합니다’체와 ‘해요’체가 섞여 있고, 몇 달 전에 바뀐 제품명이 번역 메모리에는 여전히 이전 이름으로 남아 있다. LSP는 어느 표현을 따라야 할지 문의하고, 클라이언트의 로컬라이제이션팀은 제품팀과 지역 마케팅팀에 다시 확인한다. 확인하는 사람마다 기억하는 결정이 조금씩 다르다. 결국 출시를 앞두고 리뷰어가 상당수의 문장을 다시 수정한다.
실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경우 문제는 번역가가 이전 번역을 보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회사가 그동안 내린 언어적 결정을 한 곳에 정리하고 관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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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프로젝트 후 남는 것들
번역 프로젝트가 끝나면 번역된 문장만 남는 것이 아니다. 제품의 핵심 기능을 무엇이라고 부르기로 했는지, 사용자에게 어떤 어조로 말하기로 했는지, 반복되는 문장을 이전에는 어떻게 번역했는지, 특정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이유도 함께 남는다.
이렇게 번역 과정에서 축적된 언어적 지식과 결정을 언어 자산(linguistic assets)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언어 자산에는 스타일 가이드(Style Guide), 용어집(Glossary), 번역 메모리(Translation Memory), 그리고 부가적으로 참고 자료(Reference material)와 질의 기록(Query) 등이 있다. 흔히 이들을 번역을 도와주는 참고 파일 정도로 생각하지만, 잘 관리된 언어 자산은 그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한다. 새로운 번역가와 벤더가 제품의 언어를 빠르게 이해하도록 돕고, 여러 프로젝트와 언어에 걸쳐 일관성을 유지하며, 이미 내린 결정을 매번 처음부터 논의하는 일을 줄인다. 무엇보다 언어 자산은 한 회사가 사용자에게 어떻게 말해왔는지를 기억한다.
스타일 가이드
"Download the app"은 다음과 같이 여러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앱을 다운로드하십시오.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앱을 받아보세요.
세 문장 모두 의미는 맞다. 그러나 한 제품 안에서 어떤 화면은 “다운로드하십시오”, 다른 화면은 “다운로드하세요”라고 말한다면 사용자는 미묘한 불일치를 느낀다. 어느 표현이 맞는지는 사전이나 번역가 개인의 선호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금융 서비스처럼 정확성과 신뢰감을 강조하는 제품과 가볍고 친근한 운동 앱은 사용자에게 말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타일 가이드는 이런 선택의 기준을 정한다. 존댓말의 수준, 문장의 길이, 사용자 호칭, 능동태와 수동태, 숫자와 단위 표기, 문장부호, 외래어 표기처럼 반복적으로 필요한 원칙을 담는다. UI와 마케팅, 고객지원 콘텐츠에 서로 다른 어조가 필요하다면 그 차이도 설명한다.
좋은 스타일 가이드는 금지사항만 나열하지 않는다. 브랜드가 어떤 목소리를 지향하는지 설명하고, 권장하는 표현과 피해야 할 표현을 실제 예시로 보여준다.
지향하는 표현: 운동을 시작해 보세요.
피해야 할 표현: 운동을 시작하십시오.
이유: 전문성을 유지하되 사용자에게 명령하는 인상을 줄이지 않는다.
규칙보다 중요한 것은 그 규칙을 만든 의도다. 의도를 이해한 번역가는 가이드에 없는 새로운 문장을 만났을 때도 일관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용어집
제품에는 일반 사전만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다. trip, journey, route, course 등의 단어들이 일상에서는 비슷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하나의 내비게이션이나 운동 제품 안에서는 각각 다른 기능을 가리킬 수 있다. 이 단어들을 모두 ‘경로’라고 번역하면 사용자는 서로 다른 기능을 구분하기 어렵다. 반대로 문맥마다 자유롭게 번역하면 같은 기능의 이름이 화면에 따라 달라진다. 용어집은 이런 핵심 개념의 승인된 번역을 관리한다. 조금 더 체계적인 용어집에는 원문과 번역어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정보도 포함될 수 있다.
- 용어의 정의와 품사
- 승인된 번역과 사용하지 않는 번역
- 실제 사용 예시
- 관련 기능이나 제품
- 대소문자와 복수형 규칙
- 언어 또는 지역별 예외
- 용어를 승인한 사람과 변경 이력
예를 들어 activity의 승인 번역이 ‘활동’이라고 적혀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운동 기록을 의미하는지, 사용자의 일반적인 앱 활동을 뜻하는지, 특정 제품 기능의 공식 명칭인지에 따라 다른 번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용어집은 단어의 번역보다 개념의 경계를 설명한다. “이 단어를 이렇게 번역하라”뿐 아니라 “이 용어는 무엇이며, 언제 이 번역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번역 메모리
번역 메모리(Translation Memory, TM)는 이전에 번역한 원문과 번역문을 문장 또는 세그먼트 단위로 저장한다.
새로운 원문이 들어오면 번역 툴은 번역 메모리에서 같거나 비슷한 문장을 찾아 번역가에게 제안한다. 완전히 같은 문장은 100% 매치로, 일부가 다른 문장은 퍼지 매치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전에 다음 문장을 번역했다고 해보자.
Connect your device to the app.
기기를 앱에 연결하세요.
새 프로젝트에 Connect your watch to the app이라는 문장이 들어오면 번역 메모리는 기존 번역을 비슷한 문장으로 제안한다. 번역가는 이를 참고해 빠르게 “시계를 앱에 연결하세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반복이 많은 소프트웨어와 기술 문서에서는 번역 메모리가 일정과 비용을 크게 줄여준다. 버튼, 오류 메시지, 설정 안내처럼 자주 반복되는 문구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도 유용하다. 하지만 번역 메모리는 정답을 기억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이전의 결정을 기억하는 시스템이다. 과거의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제품의 스타일이 바뀌었다면 번역 메모리는 오래된 결정도 충실하게 제안한다. 기능명이 변경되었는데 기존 번역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높은 매치율을 가진 오래된 제품명이 새로운 콘텐츠에 계속 들어갈 수 있다.
실제 실무에서 지켜보면 100% 또는 하이 퍼지(High-fuzzy) 매치라는 이유로 충분한 검토 없이 번역이 승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후 제품 화면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새로 작업한 번역가를 의심하지만, 실제 오류의 출처는 몇 년 전에 저장된 번역일 수 있다. 번역 메모리의 크기가 곧 품질을 의미하지 않는 이유다. 오래된 번역과 중복 문장, 잘못 정렬된 원문과 번역문을 정기적으로 정리하고, 제품명이나 스타일 변경이 기존 데이터에도 반영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참고 자료
스타일 가이드와 용어집, 번역 메모리가 모두 있어도 문맥이 없으면 정확한 번역이 어려울 수 있다. 특히 소프트웨어 번역가의 경우 완성된 화면을 보면서 작업하기보다 TMS 안에 나열된 문자열을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번역 툴에 "charge" 단어 하나만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배터리를 ‘충전’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요금을 ‘청구’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명사라면 ‘충전량’, ‘요금’ 또는 ‘혐의’를 뜻할 가능성도 있다. 원문은 하나지만 제품 안에서 필요한 번역은 전혀 다르다. 스크린샷, 기능 설명, 문자열 ID, 글자 수 제한, 이전 화면과 다음 화면에 관한 정보가 있다면 번역가는 훨씬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게임이라면 캐릭터의 성별과 성격, 다른 인물과의 관계, 장면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자료가, 동영상 자막이라면 영상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참고 자료는 부가적인 친절이 아니라 번역 품질을 결정하는 언어 자산이다. 번역가에게 더 정확하게 번역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제품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면, 번역가는 언어를 옮기는 동시에 제품의 맥락까지 추측해야 한다.
질의 기록
번역 과정에서는 가이드에 없는 문제가 계속 나타난다. 새로운 기능명을 번역할 것인지 영어로 유지할 것인지, 마케팅팀이 선호하는 표현을 UI에도 적용할 것인지, 글자 수 때문에 승인 용어의 축약형을 사용할 수 있는지처럼 기존 규칙만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문제는 질문에 한 번 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메일이나 메신저에서 결정된 내용이 공식 자산에 반영되지 않으면 몇 달 뒤 같은 질문이 다시 등장한다. 담당자가 바뀌면 결정의 존재 자체를 알기 어렵다.
실제로 한 프로젝트에서 특정 용어를 지역팀의 요청으로 변경했더라도 그 내용이 용어집에는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다음 프로젝트의 번역가는 기존 승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지역팀은 “지난번에 이미 바꿨는데 왜 다시 돌아왔느냐”고 묻는다. 번역가는 제공받은 자산을 정확히 따랐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사람처럼 보인다.
따라서 중요한 질의와 결정은 검색할 수 있는 형태로 기록하고, 필요한 경우 스타일 가이드와 용어집, 번역 메모리에 반영해야 한다. 결정 기록은 최종 답변뿐 아니라 변경의 이유와 적용 범위를 함께 남길 때 더 유용하다.
모든 자산이 자산은 아니다
많은 벤더 및 클라이언트 회사들이 스타일 가이드와 용어집, 번역 메모리 등 '자산'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나 파일이 '존재'한다는 것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는 것은 다르다. 스타일 가이드는 몇 년째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텀베이스에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 제품명이 남아 있으며, 번역 메모리는 서로 다른 벤더가 만든 번역으로 중복되어 있을 수 있다. 지역팀에서 승인한 변경이 본사의 중앙 자산에는 반영되지 않거나, 새 벤더가 최신 파일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오래되고 부정확한 자산은 아무 자료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번역가와 벤더는 공식 자료이기 때문에 신뢰하지만, 그 안의 정보가 이미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언어 자산을 실제 자산으로 만들려면 최소한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자산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 누가 변경을 승인하는가?
- 어떤 버전이 최신인가?
- 변경 사항은 번역가와 벤더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 지역팀과 리뷰어의 피드백은 어디에 반영되는가?
-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번역은 어떻게 폐기하는가?
- 회사나 벤더가 바뀌어도 자산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가?
자산 관리는 문서를 한 번 만드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번역과 리뷰에서 나온 결정을 다시 시스템에 돌려보내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언어 자산은 번역가의 일을 줄이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가와 리뷰어, 벤더, 클라이언트의 로컬라이제이션, 지역팀, 제품팀이 같은 기준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조직의 기억에 가깝다. 이 기억이 없다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같은 용어를 다시 논의하고, 같은 질문에 다시 답하며, 이전에 수정했던 오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담당자나 벤더가 바뀔 때마다 제품의 목소리도 함께 달라질 수 있다.
로컬라이제이션에서 MT와 AI의 활용이 늘어날수록 언어 자산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진다. AI는 자연스러운 문장을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특정 회사가 어떤 기능명을 승인했는지, 사용자에게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하는지, 과거의 어떤 번역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지는 스스로 알지 못한다. 명확하고 최신 상태의 자산이 없으면 AI는 더 빠른 속도로 서로 다른 표현을 만들어낼 뿐이다.
좋은 번역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한다. 잘 관리된 언어 자산은 그다음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지 않도록 한다.
번역 프로젝트가 문장을 남긴다면, 성숙한 로컬라이제이션 프로그램은 기억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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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컬라이제이션의 세계] #7 언어 자산 - 스타일 가이드(Style Guide)